최근에 사회문제로 대두된 신조어 '영케어러'(121p)라는 용어는 '어린 나이에 가족부양의 책임을 떠안게 된 청소년 혹은 청년을 의미한다'고 ‘사회복지 어휘력 수업’ 책에 기술되어 있다. 최근에 국회에서 '가족돌봄 등 위기 아동,청년 지원에 관한 법률안'이 통과되었다. 전국에 영케어러에게 지원할 수 있는 근거가 될 수 있기때문에 매우 환영할 만한 일이다. 하지만 '영케어러'를 한국어로 번역하여 '가족돌봄청년'이라고 사회적으로 호명하게 되면서 앞으로도 위기에 있는 아동과 청년이 가족돌봄을 해야 할 것 같은 의무를 부여하게 된 것이 아닌지 고민하게 된다. 외국에서 먼저 의미가 형성된 언어가 번역되어 사용되면서 원어의 의미를 벗어나 시혜적이고 병리적으로 사용될 수도 있다.

이번에 발간된 '사회복지 어휘력 수업'은 이 책의 2부에 어휘력의 깊이를 더할 수 있는 인권기반 윤리적 용어 150여개를 담고 있다.  이 책을 읽으며 내가 무심코 쓰는 일상단어가 차별과 혐오를 강화하고 있는 건 아니었는지 살펴보고 곱씹게 된다.

이 책의 1부에서는 사회복지사가 알아야 할 실무용어와 신조어 350여개를 자세히 설명해주고 있다.  사회복지사의 꿈을 꾸고 공부하는 학생들과 신입사회복지사, 사회복지현장에 경력있는 사회복지사 모두 이 책을 읽었으면 한다. 사회가 빠르게 변화면서 새롭게 생겨나는 사회신조어를 친절하게 설명하고 있다. 최근에 복지현장에 새롭게 도입되고 있는 ESG경영, 지속가능한 발전목표 SDGs 같은 용어도 친절하게 설명되어 있어서 이 책을 읽으면서 반가웠다.

이 책은 사회복지현장에서 근무했던 인권 강사 6인이 함께 모여 1년동안 수많은 단어를 붙잡고 고민하고 연구한 결과물이다. 이 책을 쓰기 위해 치열하게 노력해주신 6명에 저자에게 깊은 감사를 드린다. 이 책에 편집자이며 저자였던 책글사람 전안나 대표의 글을 인용하며 서평을 마친다.

"우리가 사용하는 단어는 나의 가치와 인식을 반영하기에 우리의 말을 바꾸면 가치와 인식이 달라진다. 가치와 인식이 달라지면 행동이 달라지고, 사회복지사의 행동이 달라지면 사회복지 조직이 달라지고, 조직이 달라지면 우리 사회가 달라질 것이라고 믿는다."

#책글사람 #사회복지서평단 #인권기반용어사전 #전안나 #서영협 #김연정 #송부연 #지승훈 #이선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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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만난 청소년에 대하여

<위기 청소년 거리상담 · 사례관리 수업>

 

이 책을 펴낸 전종수 작가는 15년간 위기에 처한 청소년을 상담하고 지원하는 사회복지사였고, 현재는 위기 청소년과 청년의 자립을 진심으로 돕는 유스트로우 대표이다.

이 책은 학교 밖 청소년을 돕기위해 학교에서 진행되는 월~금요일까지 시간표에 따라 목차를 구성하였다. 이 책의 목차대로 월요일 1교시부터 금요일 7교시까지 읽으며 위기청소년을 어떻게 도울 수 있을지 잘 배울 수 있을 것이다. 거리에서 만나는 위기 청소년의 상황을 알리고, 청소년을 어떻게 도울수 있을지 다양한 정보를 제공한다. 또한 15년간 청소년복지에 종사하며 실제 위기 청소년들과의 거리상담과 사례관리 경험한 내용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하여 친절하게 설명하고 있다. 위기에 있는 청소년과 청년을 이해하고, 청소년을 돕는 실무자의 생생한 이야기를 옆볼수 있었다.

 

목요일 1교시에 수록된 처음 만나는 청소년과 첫 대면을 자연스럽게 시작하는 것이 어려워요이런 고민에 저자는 청소년을 이해하기 위해서 초기면접지라는 서류의 칸을 채우는 것에 치중하지 말고, 말을 건네고 답을 듣는 과정에 눈을 마주치며 생각과 감정을 나누는 대화가 필요하다고 조언한다. ‘청소년의 반복되는 어려움과 생활사건이 과연 해결될까요?’ 라는 질문에 초보 상담사들은 정답을 찾아 문제를 해결하기에 급급하다. 청소년의 반복되는 어려움을 바라보면서 문제와 삶은 구별될 필요가 있다가 말한다. 우리는 청소년의 삶을 대신 살아 줄 수 없고, 대신 선택할 수 없다. 우리가 봤을 때 도돌이표 같은 선택이라도 오늘의 그에게는 최선이었을 거라고 믿어줘야 한다. 가정 밖 생활 중인 청소년들이 말하는 안정된 삶의 기준은 생각보다 큰 행복에 있지 않다. 지금 살아가는데 필요한 의식주와 나를 알아주는 한 사람이 있다는 것이 삶의 안정감을 준다. 청소년이 꿈꾸는 삶의 모습은 따뜻한 날 햇살이 비추는 어느 아침 날처럼 평범한 일상을 맞이하고 일어나 삶에 주어진 과업들을 하나씩 해내며 살아가는 것이다. 평범한 일상을 위기 청소년들은 꿈꾸고 있다. 그저 안부 메시지 한통을 보내고 그저 밥 한 끼를 같이 먹어줄 수 있는 어른이 필요하다.

 

책을 다 읽고서 거리상담사로 내가 청소년을 위해 일할 수는 없어도 어려움을 가진 청소년과 청년이 사는 마을에 그런 어른이 되어 따뜻한 밥 한끼를 사줄 수 있는 사람이 되고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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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복지사는 어때?

올해 초등학생을 졸업한 딸이 진로에 대해서 고민을 하고 있다. 초등학교 선생님이 되고 싶다고 한다. 아이들에게 좋은 선생님, 인기있는 선생님이 되고 싶은게 꿈이라고 한다. 교대를 입학해서 임용고시를 어떻게 합격할 수 있을지 벌써부터 걱정을 하고 있다. 딸에게 학교에서 일할 수 있는 학교사회복지사도 괜찮다고 추천했다.

초등학생의 진로와 직업탐색을 위한 잡프로포즈 ‘사회복지사는 어때?’ 책을 한 호흡에 쭉 읽게 되었다. 전안나 작가는 사회복지현장에서 21년동안 일했던 실력있는 사회복지사이다. 지금은 베스트셀러 작가며 강사로 다양한 곳을 누비며 미래 사회복지사 양성에도 힘을 보태고 있다. 엄청난 독서가이고, 글쓰기 강사여서 그런지 사회복지와 사회복지사를 쉽게 알려줄 수 있는 책을 집필했다.

이 책은 전안나 사회복지사가 이 직업을 참 좋아하고, 잘 하고 싶은 마음을 아이들과 청소년에게 ‘사회복지사는 어때?’ 하며 달콤한 프로포즈를 한다.
어쩌면 많이 어려울 수 있는 사회복지가 무엇인지 아이들이 이해할 수 있게 서술하고 있고, 다양한 현장의 사회복지사의 세계와 사회복지사의 매력과 사회복지사가 되려면 어떤 마음가짐과 준비를 하면 좋을지 친절하게 알려준다. 전안나 작가는 어린시절부터 현재 프린랜서 사회복지사가 되기까지의 이야기를 들려주며 사회복지사를 생동감있게 소개해준다. 책의 후반부에는 어린이가 물을 만한 10문 10답을 작성하여 사회복지사에 대한 궁금증을 해소해준다. 사회복지사가 어떤 업무를 하는지 ‘사회복지 현장 글쓰기 예시’를 들어 살짝 엿보게 하고, 나도 사회복지사가 된 것처럼 다양한 복지정보와 정책을 검색해볼 수 있게 돕고, 사회복지사 선서문도 써볼 수 있게 한다.
사회복지사를 설명하면서 전안나 작가가 일할 때 다양한 사진도 많고, 책을 예쁜 일러스트로 꾸며서 아이들이 재미있게 사회복지사를 접할 수 있을 것 같다. 진정한 실력자는 어려운 것을 쉽고 간단하게 설명할 수 있다. 실력있는 사회복지사 전안나 작가가 그 일을 해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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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브랜드 사회복지사’를 읽고서

나 브랜드 사회복지사 책을 읽으면서
정말 멋진 사회복지사를 9명 만났다.

현장에 있을때 부터 사회복지 가치와 철학을 가지고 자기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냈던 사람이었다. 복지꿀팁 김근태 대표는 복지현장에 있을때 보다 프리랜서로 있을때 창의적이고 자유롭게 일하수 있어서 더 빛을 발하고 있는 것 같다.

9명 저자가 현장에서 사회복지사로 근무하면서 프리랜서로 된 경위와 퍼스널 브랜드를 어떻게 준비하고 구축하게 되었는지 자세히 읽을 수 있다.

프리랜서로 안정적인 수입 벌기가 녹녹치 않았을 것이다. 어쩌면 복지기관에서 안정적인 월급을 받는 것이 더 쉬운 길일 것이다. 저자 마다 프리랜서 경력과 유명세가 다르지만 복지기관에서 근무할때보다 몇배나 많은 수입을 얻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현장에 계속 있으면서 자신만의 브랜드를 가지고 복지만화가 이창신 저자, 당사자와 함께하는 강점 사례관리하는 이혜주 저자의 이야기도 읽을 수 있다.

홍보하는 사회복지사 김근태 작가
심리교육하는 사회복지사 김은선 작가
모금하는 사회복지사 정현경 작가
사례관리하는 사회복지사 이혜주 작가
웰다잉하는 사회복지사 강원남 작가
문화기획하는 사회복지사 김대근 작가
장사하는 사회복지사 김태웅 작가
만화그리는 사회복지사 이창신 작가
글 쓰는 베스트셀러 사회복지사 전안나 작가

9명 사회복지사가 오랜시간 자기만의 브랜드를 만들고, 업계에서 나름 경쟁력까지 있다. 복지기관,구청,평생교육기관에서 필요한 교육을 기획할때 강사로 초빙해도 좋을 것 같다.
복지기관에서 단체조끼,기념품을 제작할때 김태웅 선생님께 연락해도 좋겠다. 장사로 사회복지를 할 수 있다니 아주 새로웠다.
복지관에서 동료와 현수막 디자인,카드뉴스 디자인을 자주 한다. 점점 멋있게 만들고 있는 우리를 보면서 동료와 함께 **애드(현수막 디자인업체) 만들자 했던게 생각난다.

현장에 있어도, 현장을 벗어나도 퍼스널 브랜드로 사회복지를 더 멋지게 실천하는 9명 저자 이야기가 우리에게 큰 영감을 준다.
나는 무엇으로 퍼스널브랜드를 만들수 있을까? 고민하게 된다. 개인 브랜드를 갖는 것이 좋아하는 사회복지를 오래동안 할 수 있는 방법 중에 하나가 될 수 있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며 몇년안에 9명의 저자를 모두 만나서 책에 싸인을 받고 싶다. 마치 어릴적 읽었던 만화책의 드래곤볼을 모으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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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영케어러-가족돌봄청년'이라는 사회문제를 2021년 언론기사에서 보고 처음 알게 되었다 . 쓰러진 아버지를 홀로 간병하다 생활고로 아버지를 방치해 죽음에 이르게 한  청년의 비극적인 사건이 주된 내용이었다.
나는 15년쨰 사회복지사로서 복지현장에서 일하고 있다. 2022년에 한 복지관에서 성인발달장애인과 정신장애인의 자립을 돕기 위한 장애인작업장 업무를 맡고 있었다. 그때 아침마다 발달장애가 있는 청년회원을 어머니가 전동휠체어를 타고 작업장에 데려다 줬다. 가끔씩 어머니가 아프실때 회원의 남동생이 그 역할을 대신했다. 그 가정에 여러가지 어려움이 있다는 것을 알게되어 가정방문을 가서 상담을 했을때 가족돌봄청년을 처음으로 만나게 되었다. 발달장애가 있는 형과 지체장애를 가진 어머니를 돌보고 있는 그 청년도 자기자신이 가족돌봄청년이라는 것을 모르고 있었다. 그 당시에 나는 그 청년이 어머니와 형과 분리되어 기숙사가 있는 타지역으로 가서 일을 한다면 자신의 삶을 찾을 수 있을꺼라는 생각을 했다.  왜냐하면 돌봄은 그 청년의 일도, 가족의 일만이 아니라 국가와 사회가 해야할 일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나는 돌봄하고 있습니다' 책을 읽으며 어렴풋하게 알고 있던 가족돌봄청년을 제대로 알 수 있었다. 직접 가족돌봄을 하고 있는 청년들이 자신들의 어려움을 생생하게 기록했기 때문에 더 의미 있는 책이다. 가족 돌봄 청년의 목소리를 세상에 들려주고, 자신이 가족돌봄청년인지 모르는채 살고 있는 아이들과 청년들에게 자신의 존재를 인식시켜 줄 것이다.  우리 사회에 가족돌봄청년의 문제가 한 가족과 청년의 개인적 문제를 넘어서 우리사회가 함께 해결해야 할 사회문제임을 깨달게 해준다.

이 책은 6부로 구성되어 있다. 1부는 '가족돌봄 청년 알기'라는 주제로 가족돌봄청년의 정의, 얼마나 있는지, 어떤 어려움이 있는지, 그들을 왜 도와야 하는지, 외국에는 가족돌봄청년을 어떻게 지원하는지 등이 짧게 기술되어있다.
2부에서 4부까지는 새벽, 윤서, 규영이라는 가족돌봄청년이 자신이 이야기를 들려준다. 초등학교 시절부터 시작된 가족돌봄의 일상, 청소년기에  고민, 어려움을 극복한 경험,그리고 아직도 진행되는 가족돌봄과 자아를 찾아가는 여정을 그리고 있다. 그들의 목소리에 강인한 생명력이 있다.  5부는 또다른 청년4명의 이야기가 짤막하게 기술되어 있다. 마지막 6부는 가족돌봄청년과 청소년이 이용할 수 있는 병원이용, 학업관리, 마음관리, 동생양육...도움요청, 다양한 지원정보와 돌봄평가척도지  등 가족돌봄청년을 위한 유익한 정보가 수록되었다.
  
돌봄 14년차 '새벽'은 초등학교 1학년부터 유전병을 가진 엄마를 돌봤다. 저자는 새벽에 응급실에 가야할 때면 엄마를 걱정하면서도 피곤함과 짜증이 몰려와 병원에 가는 것에 귀찮음을 느끼는 스스로를 자책하고 미워했다.  '학교 가기 싫어서 빠지는 것이 아니라 간병할 사람이 없어서 학교를 못 가는 것을 친구들을 이해할까?'  "또래 친구들이 진로를 고민할때 '새벽'은 자신의 진로가 아니라 엄마의 미래를 걱정했다. 한 아이를 키우려면 한 마을이 필요하다는 말이 있다. 돌봄도 그렇다. 한 어른이 한 아이가 어떻게 돌보겠는가? 마을과 사회가 함께해야한다는 새벽 청년의 문장이 기억에 남는다.

돌봄 14년차 아나운서를 꿈꾸며 달려가는 '윤서'는 '지금까지 살아가면서 후원과 지지와 격려를 아끼지 않은 사람은 바로 나 자신이다' 라고 고백했다. 대학생이 되어도 주말 오전부터 평일 밤늦게까지 아르바이트를 하고 다음날 아침 일찍 수업에 참석하고 하교후에는 엄마와 동생을 돌보는 일상을 살아야 했다. 보통은 주변에 좋은 이웃이나 선생님을 이야기할텐데 얼마나 자신이 가족을 돌보는 짐이 무겁고 힘들었는지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윤서 청년은 아나운서가 되어 어릴적 부터 가족을 돌본 이야기가 비슷한 상황에 처한 사람들에게 희망과 용기를 줄 수 있게 되기를 바란다.

돌봄 3년차  '규영'은  당뇨합병증으로 시각장애인이 된 엄마를 돌보고 있다. 가족돌봄을 하면서 나의 시간을 전부 돌봄 대상에게 집중해야하고, 생각의 흐름조차 돌봄으로만 가득차 있기에 여유가 없다. 우리 엄마를 돌봐줄 누군가가 있다면 하루 3~4시간이라도 1주일에 1~2번이라도 그런 숨통이 트이면 좋겠다.
일상에서 가족돌봄 아동,청(소)년을 찾기 쉽지 않다. 본인들이 가족 돌봄을 하고 있다는 것을 인지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가족돌봄청년 3명이 가족에 보호를 받으며 꿈을 찾아야 할 시기에 가족을 돌봐야 했다. 그들에게 힘이 되는 어른과 이웃이 되어달라고 묵직한 돌직구를 던지는 것 같다. 가족을 돌보는 아이들과 청년들이 겪는 어려움을 개인이 해결했다면 이제부터는 이들을 지원하는 법과 제도가 만들어져 사회가 함께 해결할 수 있기를 바란다.

이 책은 본인이 가족돌봄청년인지 알지 못하고 고군분투하며 살아가는 청년에게 그리고 그들과 함께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이 꼭 읽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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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문답
문:”성령으로 잉태하사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시고”라는 말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답:언제나 계시는 하나님의 영원하신 아들이 참되고 영원한 하나님의 본질을 그대로 지니신 채, 성령님의 일하심으로 말미암아 동정녀 마리아의 살과 피로부터 참된 인성을 취하셔서 다윗의 참된 자손이 되시고 모든 면에서 그 형제들과 같이 되셨으나 죄는 없으시다는 뜻입니다.

36문답
문:그리스도께서 거룩하게 잉태되고 탄생하셨다는 사실이 당신에게 어떤 유익을 줍니까?
답: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중보자가 되시기에, 그리스도께서는 그분의 순결하심과 완전한 거룩하심으로 제가 잉태되고 출생할 때부터 가지고 있는 저의 저를 하나님 앞에서 가려 주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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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문

문:우리도 하나님의 자녀인데, 왜 그리스도만 하나님의 "독생자"라고 부릅니까?

답:오직 그리스도께서만 하나님의 영원하신 참 아들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은혜로 입양된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34문

문:당신은 왜 그리스도를 "우리 주"라고 부릅니까?

답:그리스도께서 금이나 은이 아니라 그분의 보배로운 피로 우리의 몸과 영혼을 우리의 모든 죄에서 구속하셨고, 우리를 마귀의 모든 권세에서 해방해 주셨으며, 그분의 소유로 삼아 주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

독생자는 성부에게서 유일하게 나신 아들이라는 뜻입니다. 

오직 한분이시요, 유일한 방식으로 태어나신 분이십니다.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동일한 본질을 가지고 있습니다. 아버지가 전능하시기 때문에 아들도 전능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누구 입니까? 예수님을 영접했기때문에 우리도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우리는 입양된 아들입니다. 우리는 독생자이신 성자 하나님과는 차원이 다른 아들입니다. 예수님은 온 우주를 창조하신 분이지만, 우리는 피조물입니다. 

 

우리 주님,예수!

주는 여호와,혹은 하나님과 동격으로 쓰입니다. 이 집의 주인은 누구입니까? 집을 가진 임자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부를 수 있는 사람이라면,우리의 주인은 예수님입니다. 죄의 노예 신분에 있던 우리를 금이나 돈으로 사는 것 처럼 예수님은 십자가의 보배로운 피로 우리의 몸과 영혼을 우리의 모든 죄로부터 구해 주셨습니다. 

예수님이 '우리 주님' 이시면 우리는 당연히 '예수님의 종'입니다. 사람들은 '종'이 되길 싫어합니다. 종은 주인이 시키는 것만 해야하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누구의 종 인가'가 중요합니다. 나쁜 깡패가 주인이면 그는 가장 불행한 종입니다. 

천지를 창조하시고, 온 우주를 다스리시며, 죄를 용서해주시고 사탄의 올무에서 풀어주신 분이 우리의 주인이라면 사정이 다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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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문:왜 예수님을 기름 부음을 받은 자라는 의미를 지닌 “그리스도”라고 부릅니까?
답: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성부 하나님께로부터 세움을 받으시고 성령으로 기름 부음을 받으심으로 큰 선지자와 선생이 되셔서 우리의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감추어졌던 계획과 뜻을 우리에게 온전히 계시하시고, 대제사장이 되셔서 자신의 몸을 희생제물로 단번에 드려 우리를 구속하시고, 우리를 위해 하나님 아버지께 항상 간구하시며, 우리의 영원한 왕이 되셔서 그분의 말씀과 성령으로 다스리시고, 우리를 위해 값 주고 사신 그 구원을 우리가 누리도록 우리를 보호하시고 보존하시기 때문입니다.

32문:그런데 당신은 왜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립니까?
답:왜냐하면 제가 믿음으로 그리스도의 지체가 되어 그리스도의 기름 부음에 참여하기 때문입니다. 그럼으로써 저는 선지자로서 그리스도의 이름을 고백하고, 제사장으로서 저 자신을 감사의 산 제물로 그리스도께 드리며 왕으로서 이 세상에서 사는 동안 자유롭고 선한 양심으로 죄와 마귀에 대항하여 싸우고, 이후로는 영원히 그리스도와 함께 모든 피조물을 다스릴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직분입니다. 마치 윤석열은 이름이고, 대통령은 직분인 것 처럼요. 대통령의 직분은 취임식(5월10일) 이후에 발휘됩니다.

그 뜻은 헬라어로 기름부음을 받은 자입니다. 히브리어로는 메시야 힙니다. 그리스도와 메시야는 똑같은 뜻입니다. 

직분에는 기본적으로 3가지 요소가 있습니다. 직분을 세우는 사람, 직분을 세우는 수단, 그리고 직분 그 자체입니다.

직분을 세우는 사람은 성부하나님입니다. 직분을 세우는 수단은 성령을 기름부음으로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30살이 되었을때 성령을 기름부음을 받으시며 공생애를 시작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직분을 세울때 단지 임명만 해놓고 알아서 하라고 하지 않고 능력까지 주십니다. 정말 좋으신 하나님입니다.

 

구약성경에서 기름을 부어 세운 직분은 '선지자'와 '제사장'과 '왕'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세가지 직분을 세상에서 행하셨습니다.

첫째, 예수님은 그리스도로서 우리를 구원하기 위한 하나님의 비밀스런 뜻을 보여주는 큰 '선지자'이셨습니다.

둘째, 예수님은 그리스도로서 자기 몸을 한 번에 희생제사로 드려 우리의 죗값을 지불하시고, 지금도 하늘에 계신 아버지 앞에서 우리를 위하여 끊임없이 기도하시는 분으로 성령 하나님에 의해 '유일한 대제사장'으로 일하고 계십니다.

셋째, 예수님은 그리스도로서 우리를 말씀과 성령님으로 다스리시며, 우리의 구원을 이루시며 보호하시고 다스리시는 '영원한 왕'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은 우리와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죄와 하나님의 진노로 부터 구원해주시는 구원자라고 했죠~ 우리가 예수님이라고 고백할때는 우리는 우리자신을 죄인이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분을 그리스도라고 고백하면 우리는 그리스도인이 됩니다.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뜻이나 지혜나 노력이 아니라 오직 믿음을 될 수 있습니다. 믿음이란 하나님께서 성령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붙들게 하신다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 성령의 부음을 받듯이 신자들도 성령의 기름부음을 받아 그리스도를 고백하는 그리스도인이 됩니다. 그럼 우리는 3가지 직분을 삶속에서 행해야 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 먼저 선지자로서 말씀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말과 행동으로 전합니다.

불신가족(외할아버지,외삼촌 등)이나 친구와 이웃에게 복음을 전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선지자로서의 역할입니다.

두번째로 그리스도인은 제사장으로서 자기 자신을 온전히 하나님께 감사의 산 제물로 드려야 합니다. 

속죄제사는 우리가 드릴 필요가 없습니다. 예수님이 다 이루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주일에 예배합니다. 그것이 감사제사의 대표적인 예입니다. 더 나아가 월~토요일의 모든 삶도 감사의 제사로 드려야 합니다.

세번째로 그리스도인은 왕으로서 온전히 자유롭고 선한 양심으로 죄와 사탄에 맞서 싸워야 합니다. 죄가 우리 몸을 지배하지 못하게 하고 몸의 사욕을 끊어내며 지체를 (사탄의 도구)불의의 무기로 죄에 내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도구)의의 무기로 내주어야 합니다. 우리의 싸움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왕으로서 사탄과 싸워야 합니다. 이 모든것이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는 불가능하지만 선지자,제사장, 왕 되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가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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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9문답
문:왜 하나님의 아들을 구주라는 이름을 지닌 “예수”라고 부릅니까?
답:그분이 우리를 구원하여 우리를 우리 죄에서 해방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또한 그분 외에는 구원을 구해서도 안 되며, 찾을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제30문답
문:그렇다면 자신의 구원과 복을 성인에게서, 혹은 자기 자신이나 다른 데서 구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런 사람들은 예수님을 유일한 구주로 믿는 것입니까?
답:아닙니다. 그들은 말로는 예수님을 자랑하지만, 실제 행위로는 유일한 구주 예수님을 부인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완전한 구주가 아니시든지, 아니면 참된 믿음으로 이 구주를 영접하는 사람들이 자신들의 구원에 필요한 모든 것을 예수님 안에서 반드시 찾든지 둘 중 하나만 참되기 때문입니다.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의 사도신경의 구조는 성부하나님의 창조,성자하나님의 구속,성령하나님의 성화라는 3가지로 크게 나누어져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부터 성자 하나님에 대해서 배울 것입니다.
사도신경의 성자 하나님의 고백은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첫째는 예수님이 어떤 분인가, 둘째는 예수님께서는 무엇을 하시는가를 다룹니다.

사도신경에서 예수님이 누구신가에 대해서 네가지로 고백합니다. 예수, 그리스도, 독생자, 주 입니다.
예수는 육신을 취하신 성자 하나님을 지칭하는 이름입니다. 이는 ‘구원하다’ 뜻의 히브리어(여호수아)를 헬라식으로 표기한 것입니다.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마 1:21)
여러분의 이름은 누가 지어주셨나요?
예수님의 이름은 하나님께서 직접 지어주셨습니다. ‘예수’라는 이름은 예수님께서 무슨 일을 하실 것인지 분명하게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시지만 사람들을 죄에서 구원해주시기 위해 사람의 몸으로 세상에 오셨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예수님에게 많은 것을 요구합니다. 여러분은 예수님께 무엇을 요구 하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이 우리를 가난에서 벗어나 부자가 되게 해주시것이라고 믿고,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우리를 아프지 않고 건강해질 수 있도록 해주신다고 합니다. 그 당시 유대인은 예수님이 로마로 부터 독립시켜 주실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구원하기 위해 오셨습니다. 지금도 예수님은 하늘 우편에 앉아 계시면서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시기 위해 기도하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유일하시며 완전하신 구원자이시다.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행4:12)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이 작성되었을 때 로마 카톨릭 교회는 예수를 구원자라고 인정하면서도 수많은 작은 구원자들을 만들었습니다. 대표적으로 성인들,천사,그리고 마리아가 신자들에게 구원에 도움을 준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들은 과연 예수님을 믿는 것일 까요? 이렇게 믿는 것은 예수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부인하는 것입니다.

또한  구원을 자기 자신에서 찾는 자들도 많았습니다. 그들은 자신이 닥친 문제를 자기 스스로 해결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물론 우리 자신들은 어느 정도 우리 문제를 해결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죄의 문제만큼은 어떤 경우도 스스로 해결 할 수 없습니다. 죄는 우리보다 훨씬 더 큰 힘을 가지고 있고, 우리 자신은 그 죄의 영향력 아래 있습니다.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한 자들이 구원에 필요한 모든 것을 오직 그분에게서만 찾아야 합니다.

Posted by 김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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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나눔: 『하나님을 아는 지식』(with 김솔)
-2021년 8월 28일 토요일 오전 7시 30분/요약 및 발제


Ⅲ. 아는 것과 아신 바 되는 것.

1. 이 땅에서 우리가 해야 할 주된 일.
1) 우리는 무엇을 위해 창조되었는가?
: 하나님을 알기 위해서.
2) 우리는 인생에서 어떤 목표를 세워야 하는가?
: 하나님을 아는 것.
3) 예수님이 주시는 ‘영생’이란 무엇인가?
: 그것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요 17:3).
4) 삶에서 다른 어떤 것보다도 더 큰 기쁨과 즐거움과 만족을 가져다주는 최고의 것은 무엇인가?
: 하나님을 아는 지식. “자랑하는 자는 이것으로 자랑할지니 곧 명철하여 나를 아는 것과 나 여호와는…자인 줄 깨닫는 것이라”(렘 9:24).
5) 인간의 상태 중에서 하나님께 가장 큰 기쁨을 드리는 상태는 어떤 것인가?
: 바로 하나님 그분에 대한 지식을 갖고 있을 때. “나는…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호 6:6).
6) 지금까지 말한 내용은 곧바로 우리 삶의 기초와 형태와 목표를 제공해 주며, 우선순위의 원리와 가치 평가의 기준까지 제공해 줌.

2. 그리스도인들은 위대한 인생의 목표가 있음.
1) 이 땅에서 해야 할 주된 일이 하나님을 아는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나면, 삶의 문제들 대부분은 저절로 자기 자리를 찾게 됨.
2) 오늘날의 세계는 알베르 카뮈가 말한 ‘부조리’나 마리 앙투아네트 열병이라 부를 수 있는 ‘불만’으로 고생하는 사람들로 가득 차 있음.
3) 하지만 그리스도인들은 유혹의 힘이 그들의 지성을 엉망으로 짓눌러 한바탕 교란시킬 때 외에는, 본질적으로 이러한 고질적인 부조리와 앙투아네트 열병에 감염되지 않음.
4) 충분히 큰 목표가 있다면, 인생은 가치가 있음.
5) 그리스도인들은 이 점에서 다른 사람들이 갖지 못한 것을 갖고 있음.
6) 하나님을 아는 것보다 더 높고, 더 숭고하며, 더 사람의 마음을 끄는 목표가 어디에 있겠는가?

3. 우리가 논의해야 할 것들.
1) 그러나 다른 각도에서 보면 우리는 아직 그리 많은 것을 말하지 않았음.
2) 하나님을 아는 것에 대해 말할 때 우리는 언어적 표현을 사용하는데, 그러한 표현들은 마치 수표와도 같아서 어떻게 그것을 현금으로 바꿀 수 있는지를 알지 못한다면 아무런 쓸모가 없음.
3) 하나님을 아는 것이라는 문구를 사용할 때 우리는 무엇에 대해 말하는 것인가?
4) 특히 성경에 따르면, 이러한 영역에서 우리는 스스로에게 속아 실제로 하나님을 모르면서도 하나님을 안다고 생각하기 쉽기 때문에 더욱 그러함.
5) ‘하나님을 아는 것’이라고 적절하게 묘사할 수 있는 것은 어떤 종류의 활동 혹은 사건인가?

4. 하나님을 아는 것에 포함되는 것.
1) 먼저 하나님을 ‘아는 것’은 다른 어떤 사람을 ‘아는 것’보다 당연히 더 복잡한 일.
2) 대상이 복잡할수록 그것을 아는 일은 더 복잡해짐.
① 언어처럼 추상적인 것에 대한 지식은 학습으로 습득할 수 있음. 비교적 묘사하기 쉬운 활동.
② 벤 네비스나 대영 박물관 같은 무생물에 대한 지식은 시찰하고 답사하면 획득됨.
③ 하지만 살아 있는 생물체를 아는 것은 훨씬 복잡한 일. 살아 있는 것들이라면, 그것의 과거 역사뿐 아니라 특정한 상황에서 어떻게 반응하고 행동할지를 알기까지는 그것을 아는 것이 아님.
④ 인간에 대해서라면 형세는 더 복잡해짐. 사람들은 비밀을 지니고 있기 때문. 우리는 다른 사람들을 아는 데 몇 가지 등급이 있음을 인식하게 됨. 우리가 다른 사람들을 아는 일의 특성과 범위는 우리에게 달려 있다기보다는 상대방에게 달려 있음.
3) 하나님을 아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에 대한 하나의 실례.
① 우리가 신분상으로건, 지적인 명성에서건, 전문적인 기술에서건, 개인적인 고결함에서건 혹은 다른 어떤 점들에서라도 우리 ‘위에’ 있다고 느끼는 어떤 사람에게 소개된다고 상상해 보자.
② 우리가 자신의 열등함을 인식할수록, 우리의 할 일은 단지 이 사람의 말을 정중하게 경청하고 그가 대화에서 주도권을 잡도록 하는 것뿐이라고 느낄 것임(여왕이나 대통령을 만난다고 생각해 보라).
③ 우리는 이 존귀한 사람을 알고 싶겠지만 이것은 상대방이 결정해야 할 문제라는 것을 충분히 인식.
④ 하지만 오히려 상대방이 즉시 자신의 비밀을 털어놓고 공통 관심사에 대해 심중에 있는 것을 솔직하게 말하며, 자신이 계획한 특별한 사업을 같이 해 보자고 권하거나 이런 유의 동업을 영구히 같이 해 보자고 청한다고 생각해 보자.
⑤ 우리는 엄청난 특권을 얻었다고 느낄 것이며, 이제 우리의 사고방식은 예전과는 하늘과 땅만큼 달라지게 될 것임.
⑥ 지금까지는 인생이 하찮고 따분하게 보였더라도, 이제 이 위대한 사람이 그의 개인적인 보좌역 가운데 한 명으로 삼아 주었으니 더 이상 그렇지 않음.
4) 하나님이 예레미야를 통해 “자랑하는 자는 이것으로 자랑할지니 곧 명철하여 나를 아는 것과”라고 하신 것은 당연한 일.
: 하나님을 아는 것은 사람의 마음을 흥분시키는 그런 관계를 갖는 것이기 때문.
① 전능하신 창조주, 만군의 주, 그 앞에서 모든 나라가 물통 속 물 한 방울과 같은 그 위대한 하나님이 당신에게 오사, 성경의 말과 진리들을 통해 당신에게 말씀하시기 시작한 것.
-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당신은 자신이 매우 낮아지는 것을 발견함.
- 하나님은 당신의 죄와 죄책과 연약함과 무지함과 어리석음에 대해 말씀하셔서, 당신으로 하여금 스스로를 절망적이고 무력하다고 판단하며 소리쳐 용서를 구하지 않을 수 없게끔 하시기 때문.
② 당신이 하나님의 말씀에 귀기울일 때 하나님은 실제로 그분의 마음을 열어 보이시며, 당신과 친구가 되시고, 당신을 동료로, 바르트의 말로 하면 언약의 동반자로 삼아 주신다는 것을 깨닫게 됨.
- 죄 많은 인간들이 하나님을 앎으로 누리는 관계는, 말하자면 하나님이 인간들을 자신의 동료로 삼으사 이제부터는 하나님의 동역자(고전 3:9을 보라)와 개인적인 친구가 되게 하는 그런 관계.
- 요셉을 감옥에서 꺼내어 바로 왕의 총리가 되게 하시는 하나님의 행동은,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행하시는 하나님의 행동에 대한 묘사임. 즉 당신은 사탄의 포로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신뢰받는 위치로 옮겨진 것.
-- 종이 되는 것이 수치스러운 일이 되는가, 자랑스러운 일이 되는가는 누구의 종이냐에 달려 있음.
-- 많은 사람이 제2차 세계대전 중 윈스턴 처칠 경을 개인적으로 섬긴 것에 매우 큰 자부심을 느꼈다고 말함.
-- 하늘과 땅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알고 섬기는 일은 얼마나 더 자랑스럽고 기쁜 일이겠는가!
5) 그렇다면 하나님을 아는 것은 어떤 활동을 포함하는가?
①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성령께서 해석해 주시는 대로 그것을 자신에게 적용하는 것.
② 하나님의 말씀과 사역이 드러내는 하나님의 본질과 특성에 주목하는 것.
③ 하나님의 초청을 받아들이고 하나님이 명하시는 일을 행하는 것.
④ 하나님이 이처럼 가까이 오사 당신을 이러한 신적 교제로 이끌어들인 것에서 보이신 사랑을 인식하고 기뻐하는 것.

5. 예수님을 아는 것.
1) 하나님을 아는 것에 대한 성경의 묘사와 유추.
① 성경은 생생한 묘사와 유추를 사용해서 이러한 개념들을 상세히 설명해 줌.
② 성경은 아들이 아버지를 아는 것처럼, 아내가 남편을 아는 것처럼, 신하가 왕을 아는 것처럼, 양이 목자를 아는 것처럼(이는 성경에서 주요하게 사용하는 네 가지 유추), 우리가 하나님을 안다고 말함.
③ 이 네 가지 유추는 모두 아는 자가 대상을 ‘바라보고’ 그 대상은 아는 자의 복지에 책임을 지는 관계를 나타냄.
④ 하나님을 아는 자들, 즉 하나님이 자신이 알려지는 것을 허용하신 자들은 하나님의 사랑과 돌보심을 받음.
2) 다른 한편 성경은 육신으로 나타난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을 통해서만 하나님을 알 수 있다고 덧붙임.
①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요 14:9).
②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 14:6).
③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에 대해 마음속으로 분명하게 정리하는 것이 중요.
3) 예수님이 지상에 계실 때 그분의 제자들이 예수님을 알았던 행위는, 앞의 예에 나온 처칠 경을 아는 것과 직접적으로 비교할 수 있는 일이었음.
① 예수님, 즉 권위를 가지고 말하는 랍비이자, 선지자 이상의 선지자였고, 점차 더 많은 경외심과 경건함을 불러일으켜 마침내 제자들이 그들의 하나님으로 인정할 수밖에 없도록 만드신 주님이, 그들을 부르사 자신의 비밀을 털어놓고 그들을 자신의 대리인들로 삼으시고 하나님 나라를 세상에 선포하도록 하셨음.
② “이에 열둘을 세우셨으니 이는 자기와 함께 있게 하시고 또 보내사 전도도 하며”(막 3:14).
③ 그들은 자신들을 택하시고 친구라 부르신 예수님을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마 16:16), 왕으로 나신 분, “영생의 말씀”을 지니신 분(요 6:68)으로 인식했음.
④ 그리고 이러한 지식으로 말미암은 충성과 특권 의식은 그들의 삶 전체를 변화시킴.
4) 예수님 부활의 의미.
: 예수 그리스도가 다시 살아나셨다는 신약 성경 말씀의 의미 가운데 하나는, 갈보리에서 죽으신 그리스도께서 이제 풀려나 자유롭게 되셨으며, 따라서 어느 곳에 있는 누구든지 예수님이 육신을 가지셨던 시절에 제자들이 누렸던 것과 같은 관계를 누릴 수 있다는 말.
① 차이점들이 있다면 다음과 같은 것들.
- 첫째, 예수님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육신적이 아니라 영적으로 임재하시므로 우리의 육안으로는 보이지 않음.
- 둘째, 그리스도인들은 신약의 증거에 의거해서, 원래의 제자들이 일정한 기간에 걸쳐 서서히 이해했던 예수님의 신성과 속죄의 희생에 대한 진리를 처음부터 앎.
- 셋째, 오늘날 예수님은 우리에게 새로운 말씀을 하시는 것이 아니라, 복음서들에 기록된 자신의 말씀을 다른 성경적 증거들과 함께 우리의 양심에 적용하심으로써 말씀하심.
② 공통점.
-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 명확하게 개인적 제자도의 관계라는 사실은 예수님과 열두 제자의 관계가 그러했던 것과 마찬가지.
5) 복음서 이야기들 속에서 행하시는 예수님이 이제는 그리스도인들과 함께 행하시며, 그때나 지금이나 예수님을 아는 것에는 예수님과 같이 행하는 것이 포함됨.
① 예수님은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그들을 알며 그들은 나를 따르느니라”(요 10:27)고 말씀하셨음.
② 예수님의 “음성”은 예수님의 주장, 약속, 부르심임.
- “나는 생명의 떡이니…나는 양의 문이라.…나는 선한 목자라.…나는 부활이요”(요 6:35; 10:7,14; 11:25).
- “아들을 공경하지 아니하는 자는 그를 보내신 아버지를 공경하지 아니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요 5:23-24).
-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마 11:28-29).
③ 예수님의 주장이 인정될 때, 예수님의 약속이 신뢰를 받을 때, 예수님의 부르심에 응답이 있을 때, 예수님의 음성은 ‘들린’ 것.
④ 그때부터 예수님은 목자로 알려지시며, 그분을 신뢰하는 사람들을 자신의 양으로 아심.
⑤ “나는 그들을 알며 그들은 나를 따르느니라. 내가 그들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하지 아니할 것이요 또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요 10:27-28).
⑥ 예수님을 아는 것은 금세와 내세에서 그분에 의해 죄와 죄책과 사망으로부터 구원받는 것.

6. 인격적 문제.
: 이제 한걸음 물러서서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 의미하는 바에 대해 말한 것을 검토해 볼 때, 다음과 같은 강조점을 정리할 수 있음.
1) 하나님을 아는 것은 인격적인 교제임.
① 하나님을 아는 것은 하나님에 대해 아는 것 이상임.
② 그것은 하나님이 자신을 열어 보이심에 따라 하나님과 교제하는 것, 그리고 하나님이 당신을 아심으로 하나님의 교제의 대상이 되는 것.
③ 하나님에 대해 아는 것은 하나님을 신뢰하기 위한 선결 조건이지만[“그들이…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롬 10:14)], 하나님에 대한 우리 지식의 폭이 하나님을 아는 우리 지식의 깊이를 측량해 주는 척도는 아님.
- 만일 정확하게 개념을 아는 것이 중요하다면, 가장 박식한 성경학자야말로 다른 어떤 사람보다 하나님을 잘 알 것임.
- 하지만 그렇지 않음. 머릿속으로는 올바른 개념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가슴으로는 그 개념들이 언급하는 실재를 전혀 맛보지 못할 수도 있음.
- 성령으로 충만해 성경을 읽고 설교를 듣는 순박한 사람들은, 신학적으로 자신이 옳다고 만족하는 박식한 학자보다 하나님과 구세주를 훨씬 깊이 알 것임.
- 전자는 실제로 진리를 자신의 삶에 적용하는 것과 관련하여 하나님과 교제를 나눌 것이지만, 후자는 그렇지 않을 것이기 때문.
2) 하나님을 아는 것은 인격적으로 관련되는 일.
: 곧 지성과 의지와 감정이 관련됨. 그렇지 않다면 그것은 완전한 인격적인 관계가 아님.
① “너희는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지어다”(시 34:8)라고 시편 기자는 말함.
- 우정의 경험을 ‘맛보기’까지는 다른 사람의 진정한 특성을 알 수 없음.
- 친구란 서로에 대한 생각을 나누고 공통 관심사에 대한 생각을 나눔으로써, 서로에게 언제나 어떤 맛을 전달함.
- 그들은 상대방에 대해 생각할 뿐 아니라 상대방에게 공감함.
- 이는 친구들이 상대방에 대해 갖는 지식의 본질적인 측면이며, 하나님을 아는 그리스도인의 지식-앞에서 살펴본 대로 이것 자체가 친구 사이의 관계임-에도 이와 똑같은 것이 적용됨.
② 오늘날에는 하나님을 아는 것의 감정적 측면이 종종 경시됨.
- 감상적인 자기 도취를 부추길까 우려해서임.
- 물론 자기 도취적인 종교는 가장 비종교적이며, 하나님이 우리에게 위로를 주시거나 우리의 행복이나 만족을 위해 혹은 ‘종교적 체험들’을 공급하기 위해 존재하시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은 끊임없이 강조할 필요가 있음.
- 또한 누구든지 ‘종교적 체험들’에 근거해서 “그를 아노라 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지 아니하는 자는 거짓말하는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다”(요일 2:4; 비교 9,11절: 3:6,11; 4:20)는 것을 강조할 필요가 있음.
- 하지만 이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아는 것은 지적이고 의지적인 관계일 뿐 아니라 감정적인 관계이며, 만일 그렇지 않다면 실로 인격적이고 깊은 관계가 되지 못하리라는 사실을 잊어버려서는 안 됨.
- 그리스도인은 세상에서 하나님의 대의가 승리하는 것과 그 과정들에 대해 감정적으로 관여하게 되며 또한 그래야 함.
- 신자들은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고 정당함이 입증될 때 기뻐하며, 하나님이 조롱당할 때 가장 격심한 비탄을 느낌.
-- 바나바는 안디옥으로 와서 “하나님의 은혜를 보고 기뻐하였다”(행 11:23).
-- 이와는 대조적으로 시편 기자는 “그들이 주의 법을 지키지 아니하므로 내 눈물이 시냇물같이 흐르나이다”(시 119:136)라고 썼음.
-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인들은 주님을 실망시켰다는 사실을 깨달을 때 수치와 비통함을 느낌(예를 들어, 시 51편과 눅 22:61-62을 보라).
- 때때로 하나님이 그들에게 보이신 그 영구한 사랑의 영광을 이러저러한 방식으로 확신케 될 때 기쁨에 도취되는 것을 느낌[“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니”(벧전 1:8)].
- 이것이 바로 하나님과의 우정이 지니는 감정적이고 경험적인 측면임.
- 그것을 무시하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생각들이 얼마나 참되건 간에, 자신이 생각하는 그 하나님을 아직 모른다는 것을 나타내 줌.
3) 하나님을 아는 것은 은혜임.
: 그것은 반드시 또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께 주도권이 있는 관계.
① 우리가 하나님과 사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자신의 사랑을 우리에게 알리심으로 우리가 하나님을 알도록 하셔서 우리와 사귀시는 것.
② 바울은 갈라디아 사람들에게 “이제는 너희가 하나님을 알 뿐 아니라 더욱이 하나님이 아신 바 되었거늘”(갈 4:9)이라고 씀으로써, 하나님을 아는 우리의 지식에는 이처럼 은혜가 우선되어야 함을 표명함.
③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을 아는 것은 하나님이 그들을 아신 결과임.
④ 하나님이 먼저 은혜로 그들을 택하셨기 때문에 그들이 믿음으로 하나님을 아는 것.
⑤ 안다는 말이 하나님에 대해 이런 식으로 사용될 때는, 하나님이 사랑하시고 선택하시며 구속하시고 부르시고 보존하시는 일에 주도권을 쥐시는 것을 가리키는, 주권적인 은혜의 단어가 됨.
- 하나님은 우리를 완전히 아심. ‘우리를 철두철미하게 아신다’는 것이 분명히 그 말의 의미.
-- 고린도전서 13:12에 나온 바,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불완전한 지식과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완전한 지식의 대조에서 나타나는 것처럼.
- 그러나 안다는 말의 제일 중요한 의미는 다음과 같은 구절들에서 나타남.
--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너는 내 목전에 은총을 입었고 내가 이름으로도 너를 앎이니라”(출 33:17).
-- “내가 너(예레미야)를 모태에 짓기 전에 너를 알았고 네가 배에서 나오기 전에 너를 성별하였고”(렘 1:5).
-- “나는 선한 목자라. 나는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그들을 알며…영원히 멸망하지 아니할 것이요”(요 10:14-15, 27-28).
-- 하나님이 자기 사람들을 아시는 것은, 자비로운 구원이라는 전체 목적과 관련되어 있음.
-- 그 아심은 아시는 자들을 향한 하나님의 개인적 애정, 구속의 행위, 언약적 신실함, 섭리적 보살핌을 의미.
-- 그것은 앞에서 암시한 것처럼 지금부터 영원토록 주어지는 구원을 의미.

7. 아신 바 되는 것.
1) 그러므로 가장 중요한 것은, 내가 하나님을 안다는 사실이 아니라 그 사실의 근저에 있는 더 큰 사실 곧 그분이 나를 아신다는 사실임.
① 나는 하나님의 손바닥에 아로새겨진 존재.
② 나는 결코 하나님의 마음에서 떠나지 않음.
③ 하나님을 아는 나의 모든 지식은 하나님이 계속해서 주도권을 쥐시고 나를 아시는 것에 달려 있음.
④ 하나님이 먼저 나를 아셨기 때문에, 그리고 계속해서 나를 아시기 때문에 내가 하나님을 앎.
⑤ 하나님은 친구로서 그리고 나를 사랑하는 분으로서 나를 아심.
⑥ 하나님의 눈이 내게서 벗어나거나, 하나님의 주의가 다른 곳으로 가는 순간은 없으며, 따라서 하나님의 돌보심이 멈칫 하는 때도 없음.
⑦ 이것은 중대한 사실.
⑧ 하나님이 계속해서 사랑 가운데 나를 아시고 나의 유익을 위해 나를 지켜보고 계심을 알면 말할 수 없는 위로를 받게 됨.
2) 나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은 나에 대한 최악의 것들을 처음부터 끝까지 미리 알고 계시는 상태에서 주어지는 완전히 현실적인 사랑.
① 그렇기 때문에 내가 무언가 때문에 환멸을 느끼더라도 그로 인해 하나님이 나에 대해 환멸을 느끼실 수 없으며, 내게 복을 주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결심을 억누를 수도 없음.
② 이 사실은 우리에게 큰 위안을 줌.
③ 하나님이 동료 인간들은 보지 못하는 나의 뒤틀린 부분을 모두 보시며, 내 안에서 내가 보는 것보다 더 많은 부패함을 보신다는 것을 생각하면 분명 겸손해질 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음.
④ 하지만 어떤 알 수 없는 이유로 하나님이 우리를 친구로 삼기 원하시며 나의 친구가 되기를 바라신다는 것, 그리고 나를 위해 자신의 아들을 주셔서 죽게 하심으로 이러한 목적을 이루신 것을 생각해 보면, 또한 하나님을 예배하고 사랑할 만한 충분한 동기가 생김.
3) 이것들은 아는 것이란 단지 우리가 하나님을 아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아시는 것을 의미한다는 사실을 보여 주기에 충분함.

Posted by 김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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