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나눔: 『하나님을 아는 지식』(with 김솔)
-2021년 8월 28일 토요일 오전 7시 30분/요약 및 발제
Ⅲ. 아는 것과 아신 바 되는 것.
1. 이 땅에서 우리가 해야 할 주된 일.
1) 우리는 무엇을 위해 창조되었는가?
: 하나님을 알기 위해서.
2) 우리는 인생에서 어떤 목표를 세워야 하는가?
: 하나님을 아는 것.
3) 예수님이 주시는 ‘영생’이란 무엇인가?
: 그것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요 17:3).
4) 삶에서 다른 어떤 것보다도 더 큰 기쁨과 즐거움과 만족을 가져다주는 최고의 것은 무엇인가?
: 하나님을 아는 지식. “자랑하는 자는 이것으로 자랑할지니 곧 명철하여 나를 아는 것과 나 여호와는…자인 줄 깨닫는 것이라”(렘 9:24).
5) 인간의 상태 중에서 하나님께 가장 큰 기쁨을 드리는 상태는 어떤 것인가?
: 바로 하나님 그분에 대한 지식을 갖고 있을 때. “나는…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호 6:6).
6) 지금까지 말한 내용은 곧바로 우리 삶의 기초와 형태와 목표를 제공해 주며, 우선순위의 원리와 가치 평가의 기준까지 제공해 줌.
2. 그리스도인들은 위대한 인생의 목표가 있음.
1) 이 땅에서 해야 할 주된 일이 하나님을 아는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나면, 삶의 문제들 대부분은 저절로 자기 자리를 찾게 됨.
2) 오늘날의 세계는 알베르 카뮈가 말한 ‘부조리’나 마리 앙투아네트 열병이라 부를 수 있는 ‘불만’으로 고생하는 사람들로 가득 차 있음.
3) 하지만 그리스도인들은 유혹의 힘이 그들의 지성을 엉망으로 짓눌러 한바탕 교란시킬 때 외에는, 본질적으로 이러한 고질적인 부조리와 앙투아네트 열병에 감염되지 않음.
4) 충분히 큰 목표가 있다면, 인생은 가치가 있음.
5) 그리스도인들은 이 점에서 다른 사람들이 갖지 못한 것을 갖고 있음.
6) 하나님을 아는 것보다 더 높고, 더 숭고하며, 더 사람의 마음을 끄는 목표가 어디에 있겠는가?
3. 우리가 논의해야 할 것들.
1) 그러나 다른 각도에서 보면 우리는 아직 그리 많은 것을 말하지 않았음.
2) 하나님을 아는 것에 대해 말할 때 우리는 언어적 표현을 사용하는데, 그러한 표현들은 마치 수표와도 같아서 어떻게 그것을 현금으로 바꿀 수 있는지를 알지 못한다면 아무런 쓸모가 없음.
3) 하나님을 아는 것이라는 문구를 사용할 때 우리는 무엇에 대해 말하는 것인가?
4) 특히 성경에 따르면, 이러한 영역에서 우리는 스스로에게 속아 실제로 하나님을 모르면서도 하나님을 안다고 생각하기 쉽기 때문에 더욱 그러함.
5) ‘하나님을 아는 것’이라고 적절하게 묘사할 수 있는 것은 어떤 종류의 활동 혹은 사건인가?
4. 하나님을 아는 것에 포함되는 것.
1) 먼저 하나님을 ‘아는 것’은 다른 어떤 사람을 ‘아는 것’보다 당연히 더 복잡한 일.
2) 대상이 복잡할수록 그것을 아는 일은 더 복잡해짐.
① 언어처럼 추상적인 것에 대한 지식은 학습으로 습득할 수 있음. 비교적 묘사하기 쉬운 활동.
② 벤 네비스나 대영 박물관 같은 무생물에 대한 지식은 시찰하고 답사하면 획득됨.
③ 하지만 살아 있는 생물체를 아는 것은 훨씬 복잡한 일. 살아 있는 것들이라면, 그것의 과거 역사뿐 아니라 특정한 상황에서 어떻게 반응하고 행동할지를 알기까지는 그것을 아는 것이 아님.
④ 인간에 대해서라면 형세는 더 복잡해짐. 사람들은 비밀을 지니고 있기 때문. 우리는 다른 사람들을 아는 데 몇 가지 등급이 있음을 인식하게 됨. 우리가 다른 사람들을 아는 일의 특성과 범위는 우리에게 달려 있다기보다는 상대방에게 달려 있음.
3) 하나님을 아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에 대한 하나의 실례.
① 우리가 신분상으로건, 지적인 명성에서건, 전문적인 기술에서건, 개인적인 고결함에서건 혹은 다른 어떤 점들에서라도 우리 ‘위에’ 있다고 느끼는 어떤 사람에게 소개된다고 상상해 보자.
② 우리가 자신의 열등함을 인식할수록, 우리의 할 일은 단지 이 사람의 말을 정중하게 경청하고 그가 대화에서 주도권을 잡도록 하는 것뿐이라고 느낄 것임(여왕이나 대통령을 만난다고 생각해 보라).
③ 우리는 이 존귀한 사람을 알고 싶겠지만 이것은 상대방이 결정해야 할 문제라는 것을 충분히 인식.
④ 하지만 오히려 상대방이 즉시 자신의 비밀을 털어놓고 공통 관심사에 대해 심중에 있는 것을 솔직하게 말하며, 자신이 계획한 특별한 사업을 같이 해 보자고 권하거나 이런 유의 동업을 영구히 같이 해 보자고 청한다고 생각해 보자.
⑤ 우리는 엄청난 특권을 얻었다고 느낄 것이며, 이제 우리의 사고방식은 예전과는 하늘과 땅만큼 달라지게 될 것임.
⑥ 지금까지는 인생이 하찮고 따분하게 보였더라도, 이제 이 위대한 사람이 그의 개인적인 보좌역 가운데 한 명으로 삼아 주었으니 더 이상 그렇지 않음.
4) 하나님이 예레미야를 통해 “자랑하는 자는 이것으로 자랑할지니 곧 명철하여 나를 아는 것과”라고 하신 것은 당연한 일.
: 하나님을 아는 것은 사람의 마음을 흥분시키는 그런 관계를 갖는 것이기 때문.
① 전능하신 창조주, 만군의 주, 그 앞에서 모든 나라가 물통 속 물 한 방울과 같은 그 위대한 하나님이 당신에게 오사, 성경의 말과 진리들을 통해 당신에게 말씀하시기 시작한 것.
-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당신은 자신이 매우 낮아지는 것을 발견함.
- 하나님은 당신의 죄와 죄책과 연약함과 무지함과 어리석음에 대해 말씀하셔서, 당신으로 하여금 스스로를 절망적이고 무력하다고 판단하며 소리쳐 용서를 구하지 않을 수 없게끔 하시기 때문.
② 당신이 하나님의 말씀에 귀기울일 때 하나님은 실제로 그분의 마음을 열어 보이시며, 당신과 친구가 되시고, 당신을 동료로, 바르트의 말로 하면 언약의 동반자로 삼아 주신다는 것을 깨닫게 됨.
- 죄 많은 인간들이 하나님을 앎으로 누리는 관계는, 말하자면 하나님이 인간들을 자신의 동료로 삼으사 이제부터는 하나님의 동역자(고전 3:9을 보라)와 개인적인 친구가 되게 하는 그런 관계.
- 요셉을 감옥에서 꺼내어 바로 왕의 총리가 되게 하시는 하나님의 행동은,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행하시는 하나님의 행동에 대한 묘사임. 즉 당신은 사탄의 포로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신뢰받는 위치로 옮겨진 것.
-- 종이 되는 것이 수치스러운 일이 되는가, 자랑스러운 일이 되는가는 누구의 종이냐에 달려 있음.
-- 많은 사람이 제2차 세계대전 중 윈스턴 처칠 경을 개인적으로 섬긴 것에 매우 큰 자부심을 느꼈다고 말함.
-- 하늘과 땅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알고 섬기는 일은 얼마나 더 자랑스럽고 기쁜 일이겠는가!
5) 그렇다면 하나님을 아는 것은 어떤 활동을 포함하는가?
①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성령께서 해석해 주시는 대로 그것을 자신에게 적용하는 것.
② 하나님의 말씀과 사역이 드러내는 하나님의 본질과 특성에 주목하는 것.
③ 하나님의 초청을 받아들이고 하나님이 명하시는 일을 행하는 것.
④ 하나님이 이처럼 가까이 오사 당신을 이러한 신적 교제로 이끌어들인 것에서 보이신 사랑을 인식하고 기뻐하는 것.
5. 예수님을 아는 것.
1) 하나님을 아는 것에 대한 성경의 묘사와 유추.
① 성경은 생생한 묘사와 유추를 사용해서 이러한 개념들을 상세히 설명해 줌.
② 성경은 아들이 아버지를 아는 것처럼, 아내가 남편을 아는 것처럼, 신하가 왕을 아는 것처럼, 양이 목자를 아는 것처럼(이는 성경에서 주요하게 사용하는 네 가지 유추), 우리가 하나님을 안다고 말함.
③ 이 네 가지 유추는 모두 아는 자가 대상을 ‘바라보고’ 그 대상은 아는 자의 복지에 책임을 지는 관계를 나타냄.
④ 하나님을 아는 자들, 즉 하나님이 자신이 알려지는 것을 허용하신 자들은 하나님의 사랑과 돌보심을 받음.
2) 다른 한편 성경은 육신으로 나타난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을 통해서만 하나님을 알 수 있다고 덧붙임.
①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요 14:9).
②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 14:6).
③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에 대해 마음속으로 분명하게 정리하는 것이 중요.
3) 예수님이 지상에 계실 때 그분의 제자들이 예수님을 알았던 행위는, 앞의 예에 나온 처칠 경을 아는 것과 직접적으로 비교할 수 있는 일이었음.
① 예수님, 즉 권위를 가지고 말하는 랍비이자, 선지자 이상의 선지자였고, 점차 더 많은 경외심과 경건함을 불러일으켜 마침내 제자들이 그들의 하나님으로 인정할 수밖에 없도록 만드신 주님이, 그들을 부르사 자신의 비밀을 털어놓고 그들을 자신의 대리인들로 삼으시고 하나님 나라를 세상에 선포하도록 하셨음.
② “이에 열둘을 세우셨으니 이는 자기와 함께 있게 하시고 또 보내사 전도도 하며”(막 3:14).
③ 그들은 자신들을 택하시고 친구라 부르신 예수님을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마 16:16), 왕으로 나신 분, “영생의 말씀”을 지니신 분(요 6:68)으로 인식했음.
④ 그리고 이러한 지식으로 말미암은 충성과 특권 의식은 그들의 삶 전체를 변화시킴.
4) 예수님 부활의 의미.
: 예수 그리스도가 다시 살아나셨다는 신약 성경 말씀의 의미 가운데 하나는, 갈보리에서 죽으신 그리스도께서 이제 풀려나 자유롭게 되셨으며, 따라서 어느 곳에 있는 누구든지 예수님이 육신을 가지셨던 시절에 제자들이 누렸던 것과 같은 관계를 누릴 수 있다는 말.
① 차이점들이 있다면 다음과 같은 것들.
- 첫째, 예수님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육신적이 아니라 영적으로 임재하시므로 우리의 육안으로는 보이지 않음.
- 둘째, 그리스도인들은 신약의 증거에 의거해서, 원래의 제자들이 일정한 기간에 걸쳐 서서히 이해했던 예수님의 신성과 속죄의 희생에 대한 진리를 처음부터 앎.
- 셋째, 오늘날 예수님은 우리에게 새로운 말씀을 하시는 것이 아니라, 복음서들에 기록된 자신의 말씀을 다른 성경적 증거들과 함께 우리의 양심에 적용하심으로써 말씀하심.
② 공통점.
-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 명확하게 개인적 제자도의 관계라는 사실은 예수님과 열두 제자의 관계가 그러했던 것과 마찬가지.
5) 복음서 이야기들 속에서 행하시는 예수님이 이제는 그리스도인들과 함께 행하시며, 그때나 지금이나 예수님을 아는 것에는 예수님과 같이 행하는 것이 포함됨.
① 예수님은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그들을 알며 그들은 나를 따르느니라”(요 10:27)고 말씀하셨음.
② 예수님의 “음성”은 예수님의 주장, 약속, 부르심임.
- “나는 생명의 떡이니…나는 양의 문이라.…나는 선한 목자라.…나는 부활이요”(요 6:35; 10:7,14; 11:25).
- “아들을 공경하지 아니하는 자는 그를 보내신 아버지를 공경하지 아니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요 5:23-24).
-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마 11:28-29).
③ 예수님의 주장이 인정될 때, 예수님의 약속이 신뢰를 받을 때, 예수님의 부르심에 응답이 있을 때, 예수님의 음성은 ‘들린’ 것.
④ 그때부터 예수님은 목자로 알려지시며, 그분을 신뢰하는 사람들을 자신의 양으로 아심.
⑤ “나는 그들을 알며 그들은 나를 따르느니라. 내가 그들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하지 아니할 것이요 또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요 10:27-28).
⑥ 예수님을 아는 것은 금세와 내세에서 그분에 의해 죄와 죄책과 사망으로부터 구원받는 것.
6. 인격적 문제.
: 이제 한걸음 물러서서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 의미하는 바에 대해 말한 것을 검토해 볼 때, 다음과 같은 강조점을 정리할 수 있음.
1) 하나님을 아는 것은 인격적인 교제임.
① 하나님을 아는 것은 하나님에 대해 아는 것 이상임.
② 그것은 하나님이 자신을 열어 보이심에 따라 하나님과 교제하는 것, 그리고 하나님이 당신을 아심으로 하나님의 교제의 대상이 되는 것.
③ 하나님에 대해 아는 것은 하나님을 신뢰하기 위한 선결 조건이지만[“그들이…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롬 10:14)], 하나님에 대한 우리 지식의 폭이 하나님을 아는 우리 지식의 깊이를 측량해 주는 척도는 아님.
- 만일 정확하게 개념을 아는 것이 중요하다면, 가장 박식한 성경학자야말로 다른 어떤 사람보다 하나님을 잘 알 것임.
- 하지만 그렇지 않음. 머릿속으로는 올바른 개념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가슴으로는 그 개념들이 언급하는 실재를 전혀 맛보지 못할 수도 있음.
- 성령으로 충만해 성경을 읽고 설교를 듣는 순박한 사람들은, 신학적으로 자신이 옳다고 만족하는 박식한 학자보다 하나님과 구세주를 훨씬 깊이 알 것임.
- 전자는 실제로 진리를 자신의 삶에 적용하는 것과 관련하여 하나님과 교제를 나눌 것이지만, 후자는 그렇지 않을 것이기 때문.
2) 하나님을 아는 것은 인격적으로 관련되는 일.
: 곧 지성과 의지와 감정이 관련됨. 그렇지 않다면 그것은 완전한 인격적인 관계가 아님.
① “너희는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지어다”(시 34:8)라고 시편 기자는 말함.
- 우정의 경험을 ‘맛보기’까지는 다른 사람의 진정한 특성을 알 수 없음.
- 친구란 서로에 대한 생각을 나누고 공통 관심사에 대한 생각을 나눔으로써, 서로에게 언제나 어떤 맛을 전달함.
- 그들은 상대방에 대해 생각할 뿐 아니라 상대방에게 공감함.
- 이는 친구들이 상대방에 대해 갖는 지식의 본질적인 측면이며, 하나님을 아는 그리스도인의 지식-앞에서 살펴본 대로 이것 자체가 친구 사이의 관계임-에도 이와 똑같은 것이 적용됨.
② 오늘날에는 하나님을 아는 것의 감정적 측면이 종종 경시됨.
- 감상적인 자기 도취를 부추길까 우려해서임.
- 물론 자기 도취적인 종교는 가장 비종교적이며, 하나님이 우리에게 위로를 주시거나 우리의 행복이나 만족을 위해 혹은 ‘종교적 체험들’을 공급하기 위해 존재하시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은 끊임없이 강조할 필요가 있음.
- 또한 누구든지 ‘종교적 체험들’에 근거해서 “그를 아노라 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지 아니하는 자는 거짓말하는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다”(요일 2:4; 비교 9,11절: 3:6,11; 4:20)는 것을 강조할 필요가 있음.
- 하지만 이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아는 것은 지적이고 의지적인 관계일 뿐 아니라 감정적인 관계이며, 만일 그렇지 않다면 실로 인격적이고 깊은 관계가 되지 못하리라는 사실을 잊어버려서는 안 됨.
- 그리스도인은 세상에서 하나님의 대의가 승리하는 것과 그 과정들에 대해 감정적으로 관여하게 되며 또한 그래야 함.
- 신자들은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고 정당함이 입증될 때 기뻐하며, 하나님이 조롱당할 때 가장 격심한 비탄을 느낌.
-- 바나바는 안디옥으로 와서 “하나님의 은혜를 보고 기뻐하였다”(행 11:23).
-- 이와는 대조적으로 시편 기자는 “그들이 주의 법을 지키지 아니하므로 내 눈물이 시냇물같이 흐르나이다”(시 119:136)라고 썼음.
-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인들은 주님을 실망시켰다는 사실을 깨달을 때 수치와 비통함을 느낌(예를 들어, 시 51편과 눅 22:61-62을 보라).
- 때때로 하나님이 그들에게 보이신 그 영구한 사랑의 영광을 이러저러한 방식으로 확신케 될 때 기쁨에 도취되는 것을 느낌[“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니”(벧전 1:8)].
- 이것이 바로 하나님과의 우정이 지니는 감정적이고 경험적인 측면임.
- 그것을 무시하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생각들이 얼마나 참되건 간에, 자신이 생각하는 그 하나님을 아직 모른다는 것을 나타내 줌.
3) 하나님을 아는 것은 은혜임.
: 그것은 반드시 또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께 주도권이 있는 관계.
① 우리가 하나님과 사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자신의 사랑을 우리에게 알리심으로 우리가 하나님을 알도록 하셔서 우리와 사귀시는 것.
② 바울은 갈라디아 사람들에게 “이제는 너희가 하나님을 알 뿐 아니라 더욱이 하나님이 아신 바 되었거늘”(갈 4:9)이라고 씀으로써, 하나님을 아는 우리의 지식에는 이처럼 은혜가 우선되어야 함을 표명함.
③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을 아는 것은 하나님이 그들을 아신 결과임.
④ 하나님이 먼저 은혜로 그들을 택하셨기 때문에 그들이 믿음으로 하나님을 아는 것.
⑤ 안다는 말이 하나님에 대해 이런 식으로 사용될 때는, 하나님이 사랑하시고 선택하시며 구속하시고 부르시고 보존하시는 일에 주도권을 쥐시는 것을 가리키는, 주권적인 은혜의 단어가 됨.
- 하나님은 우리를 완전히 아심. ‘우리를 철두철미하게 아신다’는 것이 분명히 그 말의 의미.
-- 고린도전서 13:12에 나온 바,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불완전한 지식과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완전한 지식의 대조에서 나타나는 것처럼.
- 그러나 안다는 말의 제일 중요한 의미는 다음과 같은 구절들에서 나타남.
--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너는 내 목전에 은총을 입었고 내가 이름으로도 너를 앎이니라”(출 33:17).
-- “내가 너(예레미야)를 모태에 짓기 전에 너를 알았고 네가 배에서 나오기 전에 너를 성별하였고”(렘 1:5).
-- “나는 선한 목자라. 나는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그들을 알며…영원히 멸망하지 아니할 것이요”(요 10:14-15, 27-28).
-- 하나님이 자기 사람들을 아시는 것은, 자비로운 구원이라는 전체 목적과 관련되어 있음.
-- 그 아심은 아시는 자들을 향한 하나님의 개인적 애정, 구속의 행위, 언약적 신실함, 섭리적 보살핌을 의미.
-- 그것은 앞에서 암시한 것처럼 지금부터 영원토록 주어지는 구원을 의미.
7. 아신 바 되는 것.
1) 그러므로 가장 중요한 것은, 내가 하나님을 안다는 사실이 아니라 그 사실의 근저에 있는 더 큰 사실 곧 그분이 나를 아신다는 사실임.
① 나는 하나님의 손바닥에 아로새겨진 존재.
② 나는 결코 하나님의 마음에서 떠나지 않음.
③ 하나님을 아는 나의 모든 지식은 하나님이 계속해서 주도권을 쥐시고 나를 아시는 것에 달려 있음.
④ 하나님이 먼저 나를 아셨기 때문에, 그리고 계속해서 나를 아시기 때문에 내가 하나님을 앎.
⑤ 하나님은 친구로서 그리고 나를 사랑하는 분으로서 나를 아심.
⑥ 하나님의 눈이 내게서 벗어나거나, 하나님의 주의가 다른 곳으로 가는 순간은 없으며, 따라서 하나님의 돌보심이 멈칫 하는 때도 없음.
⑦ 이것은 중대한 사실.
⑧ 하나님이 계속해서 사랑 가운데 나를 아시고 나의 유익을 위해 나를 지켜보고 계심을 알면 말할 수 없는 위로를 받게 됨.
2) 나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은 나에 대한 최악의 것들을 처음부터 끝까지 미리 알고 계시는 상태에서 주어지는 완전히 현실적인 사랑.
① 그렇기 때문에 내가 무언가 때문에 환멸을 느끼더라도 그로 인해 하나님이 나에 대해 환멸을 느끼실 수 없으며, 내게 복을 주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결심을 억누를 수도 없음.
② 이 사실은 우리에게 큰 위안을 줌.
③ 하나님이 동료 인간들은 보지 못하는 나의 뒤틀린 부분을 모두 보시며, 내 안에서 내가 보는 것보다 더 많은 부패함을 보신다는 것을 생각하면 분명 겸손해질 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음.
④ 하지만 어떤 알 수 없는 이유로 하나님이 우리를 친구로 삼기 원하시며 나의 친구가 되기를 바라신다는 것, 그리고 나를 위해 자신의 아들을 주셔서 죽게 하심으로 이러한 목적을 이루신 것을 생각해 보면, 또한 하나님을 예배하고 사랑할 만한 충분한 동기가 생김.
3) 이것들은 아는 것이란 단지 우리가 하나님을 아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아시는 것을 의미한다는 사실을 보여 주기에 충분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