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나눔: 『하나님을 아는 지식』(with 김솔)
-2021년 8월 28일 토요일 오전 7시 30분/요약 및 발제


Ⅲ. 아는 것과 아신 바 되는 것.

1. 이 땅에서 우리가 해야 할 주된 일.
1) 우리는 무엇을 위해 창조되었는가?
: 하나님을 알기 위해서.
2) 우리는 인생에서 어떤 목표를 세워야 하는가?
: 하나님을 아는 것.
3) 예수님이 주시는 ‘영생’이란 무엇인가?
: 그것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요 17:3).
4) 삶에서 다른 어떤 것보다도 더 큰 기쁨과 즐거움과 만족을 가져다주는 최고의 것은 무엇인가?
: 하나님을 아는 지식. “자랑하는 자는 이것으로 자랑할지니 곧 명철하여 나를 아는 것과 나 여호와는…자인 줄 깨닫는 것이라”(렘 9:24).
5) 인간의 상태 중에서 하나님께 가장 큰 기쁨을 드리는 상태는 어떤 것인가?
: 바로 하나님 그분에 대한 지식을 갖고 있을 때. “나는…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호 6:6).
6) 지금까지 말한 내용은 곧바로 우리 삶의 기초와 형태와 목표를 제공해 주며, 우선순위의 원리와 가치 평가의 기준까지 제공해 줌.

2. 그리스도인들은 위대한 인생의 목표가 있음.
1) 이 땅에서 해야 할 주된 일이 하나님을 아는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나면, 삶의 문제들 대부분은 저절로 자기 자리를 찾게 됨.
2) 오늘날의 세계는 알베르 카뮈가 말한 ‘부조리’나 마리 앙투아네트 열병이라 부를 수 있는 ‘불만’으로 고생하는 사람들로 가득 차 있음.
3) 하지만 그리스도인들은 유혹의 힘이 그들의 지성을 엉망으로 짓눌러 한바탕 교란시킬 때 외에는, 본질적으로 이러한 고질적인 부조리와 앙투아네트 열병에 감염되지 않음.
4) 충분히 큰 목표가 있다면, 인생은 가치가 있음.
5) 그리스도인들은 이 점에서 다른 사람들이 갖지 못한 것을 갖고 있음.
6) 하나님을 아는 것보다 더 높고, 더 숭고하며, 더 사람의 마음을 끄는 목표가 어디에 있겠는가?

3. 우리가 논의해야 할 것들.
1) 그러나 다른 각도에서 보면 우리는 아직 그리 많은 것을 말하지 않았음.
2) 하나님을 아는 것에 대해 말할 때 우리는 언어적 표현을 사용하는데, 그러한 표현들은 마치 수표와도 같아서 어떻게 그것을 현금으로 바꿀 수 있는지를 알지 못한다면 아무런 쓸모가 없음.
3) 하나님을 아는 것이라는 문구를 사용할 때 우리는 무엇에 대해 말하는 것인가?
4) 특히 성경에 따르면, 이러한 영역에서 우리는 스스로에게 속아 실제로 하나님을 모르면서도 하나님을 안다고 생각하기 쉽기 때문에 더욱 그러함.
5) ‘하나님을 아는 것’이라고 적절하게 묘사할 수 있는 것은 어떤 종류의 활동 혹은 사건인가?

4. 하나님을 아는 것에 포함되는 것.
1) 먼저 하나님을 ‘아는 것’은 다른 어떤 사람을 ‘아는 것’보다 당연히 더 복잡한 일.
2) 대상이 복잡할수록 그것을 아는 일은 더 복잡해짐.
① 언어처럼 추상적인 것에 대한 지식은 학습으로 습득할 수 있음. 비교적 묘사하기 쉬운 활동.
② 벤 네비스나 대영 박물관 같은 무생물에 대한 지식은 시찰하고 답사하면 획득됨.
③ 하지만 살아 있는 생물체를 아는 것은 훨씬 복잡한 일. 살아 있는 것들이라면, 그것의 과거 역사뿐 아니라 특정한 상황에서 어떻게 반응하고 행동할지를 알기까지는 그것을 아는 것이 아님.
④ 인간에 대해서라면 형세는 더 복잡해짐. 사람들은 비밀을 지니고 있기 때문. 우리는 다른 사람들을 아는 데 몇 가지 등급이 있음을 인식하게 됨. 우리가 다른 사람들을 아는 일의 특성과 범위는 우리에게 달려 있다기보다는 상대방에게 달려 있음.
3) 하나님을 아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에 대한 하나의 실례.
① 우리가 신분상으로건, 지적인 명성에서건, 전문적인 기술에서건, 개인적인 고결함에서건 혹은 다른 어떤 점들에서라도 우리 ‘위에’ 있다고 느끼는 어떤 사람에게 소개된다고 상상해 보자.
② 우리가 자신의 열등함을 인식할수록, 우리의 할 일은 단지 이 사람의 말을 정중하게 경청하고 그가 대화에서 주도권을 잡도록 하는 것뿐이라고 느낄 것임(여왕이나 대통령을 만난다고 생각해 보라).
③ 우리는 이 존귀한 사람을 알고 싶겠지만 이것은 상대방이 결정해야 할 문제라는 것을 충분히 인식.
④ 하지만 오히려 상대방이 즉시 자신의 비밀을 털어놓고 공통 관심사에 대해 심중에 있는 것을 솔직하게 말하며, 자신이 계획한 특별한 사업을 같이 해 보자고 권하거나 이런 유의 동업을 영구히 같이 해 보자고 청한다고 생각해 보자.
⑤ 우리는 엄청난 특권을 얻었다고 느낄 것이며, 이제 우리의 사고방식은 예전과는 하늘과 땅만큼 달라지게 될 것임.
⑥ 지금까지는 인생이 하찮고 따분하게 보였더라도, 이제 이 위대한 사람이 그의 개인적인 보좌역 가운데 한 명으로 삼아 주었으니 더 이상 그렇지 않음.
4) 하나님이 예레미야를 통해 “자랑하는 자는 이것으로 자랑할지니 곧 명철하여 나를 아는 것과”라고 하신 것은 당연한 일.
: 하나님을 아는 것은 사람의 마음을 흥분시키는 그런 관계를 갖는 것이기 때문.
① 전능하신 창조주, 만군의 주, 그 앞에서 모든 나라가 물통 속 물 한 방울과 같은 그 위대한 하나님이 당신에게 오사, 성경의 말과 진리들을 통해 당신에게 말씀하시기 시작한 것.
-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당신은 자신이 매우 낮아지는 것을 발견함.
- 하나님은 당신의 죄와 죄책과 연약함과 무지함과 어리석음에 대해 말씀하셔서, 당신으로 하여금 스스로를 절망적이고 무력하다고 판단하며 소리쳐 용서를 구하지 않을 수 없게끔 하시기 때문.
② 당신이 하나님의 말씀에 귀기울일 때 하나님은 실제로 그분의 마음을 열어 보이시며, 당신과 친구가 되시고, 당신을 동료로, 바르트의 말로 하면 언약의 동반자로 삼아 주신다는 것을 깨닫게 됨.
- 죄 많은 인간들이 하나님을 앎으로 누리는 관계는, 말하자면 하나님이 인간들을 자신의 동료로 삼으사 이제부터는 하나님의 동역자(고전 3:9을 보라)와 개인적인 친구가 되게 하는 그런 관계.
- 요셉을 감옥에서 꺼내어 바로 왕의 총리가 되게 하시는 하나님의 행동은,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행하시는 하나님의 행동에 대한 묘사임. 즉 당신은 사탄의 포로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신뢰받는 위치로 옮겨진 것.
-- 종이 되는 것이 수치스러운 일이 되는가, 자랑스러운 일이 되는가는 누구의 종이냐에 달려 있음.
-- 많은 사람이 제2차 세계대전 중 윈스턴 처칠 경을 개인적으로 섬긴 것에 매우 큰 자부심을 느꼈다고 말함.
-- 하늘과 땅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알고 섬기는 일은 얼마나 더 자랑스럽고 기쁜 일이겠는가!
5) 그렇다면 하나님을 아는 것은 어떤 활동을 포함하는가?
①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성령께서 해석해 주시는 대로 그것을 자신에게 적용하는 것.
② 하나님의 말씀과 사역이 드러내는 하나님의 본질과 특성에 주목하는 것.
③ 하나님의 초청을 받아들이고 하나님이 명하시는 일을 행하는 것.
④ 하나님이 이처럼 가까이 오사 당신을 이러한 신적 교제로 이끌어들인 것에서 보이신 사랑을 인식하고 기뻐하는 것.

5. 예수님을 아는 것.
1) 하나님을 아는 것에 대한 성경의 묘사와 유추.
① 성경은 생생한 묘사와 유추를 사용해서 이러한 개념들을 상세히 설명해 줌.
② 성경은 아들이 아버지를 아는 것처럼, 아내가 남편을 아는 것처럼, 신하가 왕을 아는 것처럼, 양이 목자를 아는 것처럼(이는 성경에서 주요하게 사용하는 네 가지 유추), 우리가 하나님을 안다고 말함.
③ 이 네 가지 유추는 모두 아는 자가 대상을 ‘바라보고’ 그 대상은 아는 자의 복지에 책임을 지는 관계를 나타냄.
④ 하나님을 아는 자들, 즉 하나님이 자신이 알려지는 것을 허용하신 자들은 하나님의 사랑과 돌보심을 받음.
2) 다른 한편 성경은 육신으로 나타난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을 통해서만 하나님을 알 수 있다고 덧붙임.
①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요 14:9).
②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 14:6).
③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에 대해 마음속으로 분명하게 정리하는 것이 중요.
3) 예수님이 지상에 계실 때 그분의 제자들이 예수님을 알았던 행위는, 앞의 예에 나온 처칠 경을 아는 것과 직접적으로 비교할 수 있는 일이었음.
① 예수님, 즉 권위를 가지고 말하는 랍비이자, 선지자 이상의 선지자였고, 점차 더 많은 경외심과 경건함을 불러일으켜 마침내 제자들이 그들의 하나님으로 인정할 수밖에 없도록 만드신 주님이, 그들을 부르사 자신의 비밀을 털어놓고 그들을 자신의 대리인들로 삼으시고 하나님 나라를 세상에 선포하도록 하셨음.
② “이에 열둘을 세우셨으니 이는 자기와 함께 있게 하시고 또 보내사 전도도 하며”(막 3:14).
③ 그들은 자신들을 택하시고 친구라 부르신 예수님을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마 16:16), 왕으로 나신 분, “영생의 말씀”을 지니신 분(요 6:68)으로 인식했음.
④ 그리고 이러한 지식으로 말미암은 충성과 특권 의식은 그들의 삶 전체를 변화시킴.
4) 예수님 부활의 의미.
: 예수 그리스도가 다시 살아나셨다는 신약 성경 말씀의 의미 가운데 하나는, 갈보리에서 죽으신 그리스도께서 이제 풀려나 자유롭게 되셨으며, 따라서 어느 곳에 있는 누구든지 예수님이 육신을 가지셨던 시절에 제자들이 누렸던 것과 같은 관계를 누릴 수 있다는 말.
① 차이점들이 있다면 다음과 같은 것들.
- 첫째, 예수님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육신적이 아니라 영적으로 임재하시므로 우리의 육안으로는 보이지 않음.
- 둘째, 그리스도인들은 신약의 증거에 의거해서, 원래의 제자들이 일정한 기간에 걸쳐 서서히 이해했던 예수님의 신성과 속죄의 희생에 대한 진리를 처음부터 앎.
- 셋째, 오늘날 예수님은 우리에게 새로운 말씀을 하시는 것이 아니라, 복음서들에 기록된 자신의 말씀을 다른 성경적 증거들과 함께 우리의 양심에 적용하심으로써 말씀하심.
② 공통점.
-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 명확하게 개인적 제자도의 관계라는 사실은 예수님과 열두 제자의 관계가 그러했던 것과 마찬가지.
5) 복음서 이야기들 속에서 행하시는 예수님이 이제는 그리스도인들과 함께 행하시며, 그때나 지금이나 예수님을 아는 것에는 예수님과 같이 행하는 것이 포함됨.
① 예수님은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그들을 알며 그들은 나를 따르느니라”(요 10:27)고 말씀하셨음.
② 예수님의 “음성”은 예수님의 주장, 약속, 부르심임.
- “나는 생명의 떡이니…나는 양의 문이라.…나는 선한 목자라.…나는 부활이요”(요 6:35; 10:7,14; 11:25).
- “아들을 공경하지 아니하는 자는 그를 보내신 아버지를 공경하지 아니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요 5:23-24).
-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마 11:28-29).
③ 예수님의 주장이 인정될 때, 예수님의 약속이 신뢰를 받을 때, 예수님의 부르심에 응답이 있을 때, 예수님의 음성은 ‘들린’ 것.
④ 그때부터 예수님은 목자로 알려지시며, 그분을 신뢰하는 사람들을 자신의 양으로 아심.
⑤ “나는 그들을 알며 그들은 나를 따르느니라. 내가 그들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하지 아니할 것이요 또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요 10:27-28).
⑥ 예수님을 아는 것은 금세와 내세에서 그분에 의해 죄와 죄책과 사망으로부터 구원받는 것.

6. 인격적 문제.
: 이제 한걸음 물러서서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 의미하는 바에 대해 말한 것을 검토해 볼 때, 다음과 같은 강조점을 정리할 수 있음.
1) 하나님을 아는 것은 인격적인 교제임.
① 하나님을 아는 것은 하나님에 대해 아는 것 이상임.
② 그것은 하나님이 자신을 열어 보이심에 따라 하나님과 교제하는 것, 그리고 하나님이 당신을 아심으로 하나님의 교제의 대상이 되는 것.
③ 하나님에 대해 아는 것은 하나님을 신뢰하기 위한 선결 조건이지만[“그들이…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롬 10:14)], 하나님에 대한 우리 지식의 폭이 하나님을 아는 우리 지식의 깊이를 측량해 주는 척도는 아님.
- 만일 정확하게 개념을 아는 것이 중요하다면, 가장 박식한 성경학자야말로 다른 어떤 사람보다 하나님을 잘 알 것임.
- 하지만 그렇지 않음. 머릿속으로는 올바른 개념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가슴으로는 그 개념들이 언급하는 실재를 전혀 맛보지 못할 수도 있음.
- 성령으로 충만해 성경을 읽고 설교를 듣는 순박한 사람들은, 신학적으로 자신이 옳다고 만족하는 박식한 학자보다 하나님과 구세주를 훨씬 깊이 알 것임.
- 전자는 실제로 진리를 자신의 삶에 적용하는 것과 관련하여 하나님과 교제를 나눌 것이지만, 후자는 그렇지 않을 것이기 때문.
2) 하나님을 아는 것은 인격적으로 관련되는 일.
: 곧 지성과 의지와 감정이 관련됨. 그렇지 않다면 그것은 완전한 인격적인 관계가 아님.
① “너희는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지어다”(시 34:8)라고 시편 기자는 말함.
- 우정의 경험을 ‘맛보기’까지는 다른 사람의 진정한 특성을 알 수 없음.
- 친구란 서로에 대한 생각을 나누고 공통 관심사에 대한 생각을 나눔으로써, 서로에게 언제나 어떤 맛을 전달함.
- 그들은 상대방에 대해 생각할 뿐 아니라 상대방에게 공감함.
- 이는 친구들이 상대방에 대해 갖는 지식의 본질적인 측면이며, 하나님을 아는 그리스도인의 지식-앞에서 살펴본 대로 이것 자체가 친구 사이의 관계임-에도 이와 똑같은 것이 적용됨.
② 오늘날에는 하나님을 아는 것의 감정적 측면이 종종 경시됨.
- 감상적인 자기 도취를 부추길까 우려해서임.
- 물론 자기 도취적인 종교는 가장 비종교적이며, 하나님이 우리에게 위로를 주시거나 우리의 행복이나 만족을 위해 혹은 ‘종교적 체험들’을 공급하기 위해 존재하시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은 끊임없이 강조할 필요가 있음.
- 또한 누구든지 ‘종교적 체험들’에 근거해서 “그를 아노라 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지 아니하는 자는 거짓말하는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다”(요일 2:4; 비교 9,11절: 3:6,11; 4:20)는 것을 강조할 필요가 있음.
- 하지만 이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아는 것은 지적이고 의지적인 관계일 뿐 아니라 감정적인 관계이며, 만일 그렇지 않다면 실로 인격적이고 깊은 관계가 되지 못하리라는 사실을 잊어버려서는 안 됨.
- 그리스도인은 세상에서 하나님의 대의가 승리하는 것과 그 과정들에 대해 감정적으로 관여하게 되며 또한 그래야 함.
- 신자들은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고 정당함이 입증될 때 기뻐하며, 하나님이 조롱당할 때 가장 격심한 비탄을 느낌.
-- 바나바는 안디옥으로 와서 “하나님의 은혜를 보고 기뻐하였다”(행 11:23).
-- 이와는 대조적으로 시편 기자는 “그들이 주의 법을 지키지 아니하므로 내 눈물이 시냇물같이 흐르나이다”(시 119:136)라고 썼음.
-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인들은 주님을 실망시켰다는 사실을 깨달을 때 수치와 비통함을 느낌(예를 들어, 시 51편과 눅 22:61-62을 보라).
- 때때로 하나님이 그들에게 보이신 그 영구한 사랑의 영광을 이러저러한 방식으로 확신케 될 때 기쁨에 도취되는 것을 느낌[“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니”(벧전 1:8)].
- 이것이 바로 하나님과의 우정이 지니는 감정적이고 경험적인 측면임.
- 그것을 무시하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생각들이 얼마나 참되건 간에, 자신이 생각하는 그 하나님을 아직 모른다는 것을 나타내 줌.
3) 하나님을 아는 것은 은혜임.
: 그것은 반드시 또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께 주도권이 있는 관계.
① 우리가 하나님과 사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자신의 사랑을 우리에게 알리심으로 우리가 하나님을 알도록 하셔서 우리와 사귀시는 것.
② 바울은 갈라디아 사람들에게 “이제는 너희가 하나님을 알 뿐 아니라 더욱이 하나님이 아신 바 되었거늘”(갈 4:9)이라고 씀으로써, 하나님을 아는 우리의 지식에는 이처럼 은혜가 우선되어야 함을 표명함.
③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을 아는 것은 하나님이 그들을 아신 결과임.
④ 하나님이 먼저 은혜로 그들을 택하셨기 때문에 그들이 믿음으로 하나님을 아는 것.
⑤ 안다는 말이 하나님에 대해 이런 식으로 사용될 때는, 하나님이 사랑하시고 선택하시며 구속하시고 부르시고 보존하시는 일에 주도권을 쥐시는 것을 가리키는, 주권적인 은혜의 단어가 됨.
- 하나님은 우리를 완전히 아심. ‘우리를 철두철미하게 아신다’는 것이 분명히 그 말의 의미.
-- 고린도전서 13:12에 나온 바,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불완전한 지식과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완전한 지식의 대조에서 나타나는 것처럼.
- 그러나 안다는 말의 제일 중요한 의미는 다음과 같은 구절들에서 나타남.
--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너는 내 목전에 은총을 입었고 내가 이름으로도 너를 앎이니라”(출 33:17).
-- “내가 너(예레미야)를 모태에 짓기 전에 너를 알았고 네가 배에서 나오기 전에 너를 성별하였고”(렘 1:5).
-- “나는 선한 목자라. 나는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그들을 알며…영원히 멸망하지 아니할 것이요”(요 10:14-15, 27-28).
-- 하나님이 자기 사람들을 아시는 것은, 자비로운 구원이라는 전체 목적과 관련되어 있음.
-- 그 아심은 아시는 자들을 향한 하나님의 개인적 애정, 구속의 행위, 언약적 신실함, 섭리적 보살핌을 의미.
-- 그것은 앞에서 암시한 것처럼 지금부터 영원토록 주어지는 구원을 의미.

7. 아신 바 되는 것.
1) 그러므로 가장 중요한 것은, 내가 하나님을 안다는 사실이 아니라 그 사실의 근저에 있는 더 큰 사실 곧 그분이 나를 아신다는 사실임.
① 나는 하나님의 손바닥에 아로새겨진 존재.
② 나는 결코 하나님의 마음에서 떠나지 않음.
③ 하나님을 아는 나의 모든 지식은 하나님이 계속해서 주도권을 쥐시고 나를 아시는 것에 달려 있음.
④ 하나님이 먼저 나를 아셨기 때문에, 그리고 계속해서 나를 아시기 때문에 내가 하나님을 앎.
⑤ 하나님은 친구로서 그리고 나를 사랑하는 분으로서 나를 아심.
⑥ 하나님의 눈이 내게서 벗어나거나, 하나님의 주의가 다른 곳으로 가는 순간은 없으며, 따라서 하나님의 돌보심이 멈칫 하는 때도 없음.
⑦ 이것은 중대한 사실.
⑧ 하나님이 계속해서 사랑 가운데 나를 아시고 나의 유익을 위해 나를 지켜보고 계심을 알면 말할 수 없는 위로를 받게 됨.
2) 나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은 나에 대한 최악의 것들을 처음부터 끝까지 미리 알고 계시는 상태에서 주어지는 완전히 현실적인 사랑.
① 그렇기 때문에 내가 무언가 때문에 환멸을 느끼더라도 그로 인해 하나님이 나에 대해 환멸을 느끼실 수 없으며, 내게 복을 주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결심을 억누를 수도 없음.
② 이 사실은 우리에게 큰 위안을 줌.
③ 하나님이 동료 인간들은 보지 못하는 나의 뒤틀린 부분을 모두 보시며, 내 안에서 내가 보는 것보다 더 많은 부패함을 보신다는 것을 생각하면 분명 겸손해질 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음.
④ 하지만 어떤 알 수 없는 이유로 하나님이 우리를 친구로 삼기 원하시며 나의 친구가 되기를 바라신다는 것, 그리고 나를 위해 자신의 아들을 주셔서 죽게 하심으로 이러한 목적을 이루신 것을 생각해 보면, 또한 하나님을 예배하고 사랑할 만한 충분한 동기가 생김.
3) 이것들은 아는 것이란 단지 우리가 하나님을 아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아시는 것을 의미한다는 사실을 보여 주기에 충분함.

Posted by 김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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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나눔: 『하나님을 아는 지식』(with 김솔)
-2021년 8월 20일 금요일 오후 9시 30분/요약 및 발제 김성환


Ⅱ. 자기의 하나님을 아는 사람들

1. 정말 하나님을 안다고 말할 수 있는가?
1) 우리 가운데 하나님을 알고 있다고 자연스럽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음.
2) 하나님을 안다는 말은, 우리 대부분이 자신에게 낯선 것이라고 인정할 수밖에 없는 어떤 명확하고 사실적인 체험을 암시.
3) 그럼에도 우리는 하나님을 안다고 말함. 복음주의자들이라면 그렇게 말하도록 되어 있음.
4) 하지만 정말 아무런 망설임 없이, 우리 개인사의 특정한 사건들과 관련해서 하나님을 알아 왔다고 말할 수 있는가?
5) 우리 대부분은 하나님에 대해 그처럼 생생하게 체험한 적은 없을 것.

2. 과거의 실망과 현재의 비통함을 마음속에 둔 채 살아가는가?
1) 우리가 누리는 하나님에 대한 지식에 비추어 볼 때 과거의 실망과 현재의 비통함은 상관없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많지 않을 것.
2) 그것들을 생각하면 우리는 비통함과 냉담함, 침울함에 빠져 듦.
3) 이는 베드로가 당연히 여겼던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벧전 1:8)과는 한참 거리가 멂.
4) 하나님을 정말로 아는 사람들은 자신이 얻은 것에 대해서 생각할 뿐임.
5)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그리스도…을 알고자 하여”(빌 3:7-10).
① 자기가 잃어버린 것을 ‘배설물’ 즉 ‘똥’(KJV)으로 여긴다는 바울의 말은 그것들을 아무런 가치도 없는 것으로 생각한다는 뜻일 뿐만 아니라, 또한 그것들을 마음속에 둔 상태로 살아가지 않는다는 뜻.
②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누가 똥거름을 생각하면서 시간을 보내겠는가? 하지만 많은 사람이 이러한 일을 함.
③ 이는 우리가 하나님을 아는 참된 지식을 갖고 있지 못하다는 사실을 분명히 보여줌.

3. 직접 아는 것과 들어서 아는 것.
1) 우리 자신에 대해 직면하기.
① 우리는 복음을 분명하게 진술할 수 있고, 건전하지 못한 교리는 아무리 멀리 떨어진 곳에서도 감지해 낼 수 있음. 어떻게 하나님을 알 수 있느냐는 질문을 받는다면, 즉시 올바른 대답을 할 수 있음.
② 하지만 하나님을 아는 사람들의 특징인 쾌활함, 선함, 자유로움 등은 우리에게 거의 나타나지 않음.
③ 아마도 복음 진리를 비교적 덜 분명하고 덜 완전하게 아는 다른 사람들과 비교해 봐도 더 드물게 나타날 것(나중 된 자가 먼저 되고 먼저 된 자가 나중 됨).
④ 하나님을 아는 약간의 지식이 하나님에 대한 많은 양의 지식보다 값짐.
2) 우리가 짚어야 할 두 가지.
① 우리는 하나님을 많이 알지 못하면서도 하나님에 대해서는 많은 것을 알 수 있음.
- 신학을 공부하고 그것으로 누군가를 섬기는 것은 아주 좋은 일.
- 하지만 신학에 대한 관심, 하나님에 대한 지식, 기독교의 주제들에 대해 명료하게 생각하고 잘 말할 수 있는 능력은 결코 하나님을 아는 것과 같지 않음.
- 우리는 칼뱅이 알았던 만큼이나 하나님에 대해 알면서도 처음부터 끝까지 (칼뱅과는 달리) 하나님을 거의 알지 못할 수도 있음.
② 우리는 하나님을 많이 알지 못하면서도 경건에 대해 많은 것을 알 수 있음.
- 그것은 우리가 듣는 설교, 읽는 책, 사귀는 친구에 의해 좌우됨.
- 분명 그것은 기독교의 관행들에 대해 아주 많은 것을 간접적으로 배울 수 있게 해줌.
- 이렇게 배운 것을 가지고 누군가를 돕거나 그 덕분에 좋은 평판을 얻을 수도 있지만, 이 모든 것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하나님은 전혀 모를 수 있음.
3) 출발점으로 다시 돌아와서, 그렇다면 우리의 진짜 문제는 무엇인가?
① 신학을 잘 알고 있는가, 아니면 그리스도인의 삶의 문제들에 대한 접근법이 ‘균형 잡혀’ 있는가 하는 것이 아님.
② 진짜 문제는 우리가 복음주의자로서 하나님을 안다고 말해야만 한다고 느끼기 때문이 아니라, 명백한 사실이기 때문에 그렇게 말할 수 있는가임.
③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을 알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이 되고 나면 과거에 경험한 불쾌한 일이나 경험하지 못한 유쾌한 일들이 아무런 문제도 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는가임.
④ 만일 정말로 하나님을 안다면 우리는 바로 그렇다고 말할 것이며, 만일 그렇게 말하지 못한다면 하나님을 아는 것과 단지 하나님에 대해 아는 것의 차이에 좀더 명확하게 직면할 필요가 있다는 징조.

4. 하나님을 아는 증거.
: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사람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
1) 하나님을 아는 사람들은 그들이 얻은 것으로 인해 잃어버린 것과 십자가를 마음속에서 완전히 몰아내 버림(어떤 손해나 ‘십자가들’은 그들에게 더 이상 아무런 문제도 되지 않음).
2) 하나님을 아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위한 엄청난 열정을 갖고 있음.
① “오직 자기의 하나님을 아는 백성은 강하여 용맹을 떨치리라”(단 11:32).
: 공개적 행위.
- RSV에서는 “자기의 하나님을 아는 사람들은 확고히 서서 행동을 취하리라”고 번역됨.
- 이 말은 “그러나”(but)라는 말로 시작되어, “비천한 사람”(21절)의 행동과 대조를 이룸.
- 그러므로 이 구절은, 하나님을 아는 사람들이 취하는 행동은 그들 주위에서 일어나는, 하나님을 대적하는 경향에 대한 반작용이라는 것을 보여 줌.
- 그들은 하나님이 도전이나 무시를 받는 한 가만히 있을 수 없음. 그들은 무엇인가를 해야만 한다고 느낌. 하나님의 이름이 모욕당하는 것이야말로 그들로 하여금 행동을 취하게 하는 일.
- 다니엘서 중 다니엘과 그의 세 친구의 ‘위업’에 대해 말하는 장들에서 우리는 바로 이러한 일이 일어나는 것을 봄.
-- 이 네 사람은 하나님을 아는 사람들이었으며, 그 결과 때때로 반(反)종교와 그릇된 종교의 관례나 명령들에 적극적으로 저항하지 않을 수 없다고 느낌.
-- 다니엘은 특히 그런 상황이 일어나도록 내버려두지 않을 것이며 공공연하게 그것에 도전을 가해야 한다고 느낀 사람으로 나타남.
--- 왕궁의 음식을 먹음으로써 의식상 부정하게 될 수도 있는 위험을 무릅쓰기보다는, 채식만을 먹겠다고 고집해 환관장을 깜짝 놀라게 했음(단 1:8-16).
--- 다리오 왕이 기도하는 관습을 한 달 간 금하고 이를 위반하면 사형에 처하겠다고 했을 때도, 다니엘은 계속해서 하루에 세 번씩 기도했을 뿐 아니라, 열린 창 앞에서 그렇게 함으로써 모든 사람이 자기가 무엇을 하는지 볼 수 있게 했음(단 6:10)
-- 이러한 행동들을 오해해서는 안 됨.
--- 다니엘은 반항하는 일에 탐닉하고, 정부에 정면으로 ‘대항했을’ 때에만 행복해하는 무모한 인간, 고집쟁이가 아님.
--- 하나님을 아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진리와 명예가 직접적이거나 암암리에 위태로운 지경에 빠지는 상황에 민감하며, 일이 그냥 진행되도록 놓아두기보다는 개인적인 위험을 감수하고라도 사람들이 그 문제에 관심을 갖도록 하고, 그것에 대해 마음의 변화가 일어나도록 한다는 것을 보여 줄 뿐.
② 하나님을 아는 사람들은 무엇보다도 기도하는 사람들이며,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그들의 열심과 에너지는 기도에서 처음으로 표현됨.
: 공개적인 행위에서 끝나지 않음.
- 다니엘 9장에서 우리는 다니엘 선지자가 예언된 바 이스라엘의 포로 생활의 기한이 끝나 간다는 것을 “책을 통해…깨달았을”(2절) 때, 그리고 동시에 그 민족의 죄가 하나님의 자비보다는 심판을 불러일으킬 만큼 여전히 크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하나님을 어떻게 찾고 기도했는지를 보게 됨.
- 그는 “금식하며 베옷을 입고 재를 덮어쓰고…기도하며 간구”했고, 예루살렘의 회복을 위해 기도했음.
- 참으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의 변치 않는 결과는 하나님의 대의를 위해 기도하는 열정으로 표현됨.
- 하나님을 아는 이들의 내적 긴장은 실로 기도를 통해서만 표출되고 경감될 수 있음.
-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많아질수록 그러한 열망은 더욱 커짐.
- 우리에게 그러한 기도를 하고자 하는 열망이 없다면, 그리고 실제로 그러한 기도를 거의 하지 않는다면, 이는 우리가 아직 우리의 하나님을 거의 모른다는 분명한 표시.
3) 하나님을 아는 사람들은 하나님에 대한 위대한 생각을 품고 있음.
① 우리는 하나님을 위대한 분으로 생각하는가?
- 팔레스틴을 집어삼킨 바벨론 제국의 힘과 장려함 그리고 또 다른 위대한 제국이 뒤따라 나타날 가능성, 곧 인간적인 기준으로 보면 이스라엘을 왜소하게 보기에 충분한 상황에 직면해서, 다니엘서는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왕의 왕이시며 주의 주가 되신다는 사실과 “하나님이 다스리심”(단 4:26)을 이야기함.
- 역사의 모든 시점에서 하나님의 손이 작용하신다는 것, 역사(history)는 실로 ‘그분의 이야기’(his story) 곧 그분의 영원한 계획이 펼쳐지는 것에 불과하다는 것 그리고 결국에 가서 하나님의 나라가 승리하리라는 것을 극적으로 상기시켜 줌.
- 다니엘은 바로 그 진리를 2장과 4장에서 느부갓네살에게 가르쳤으며, 5장에서 벨사살에게 상기시켰고(18-23절), 4장에서 느부갓네살은 이를 인정했으며(34-37절), 6장에서 다리오가 고백했음(25-27절).
- 또한 “지극히 높으신 이가 사람의 나라를 다스리신다”(단 4:25; 또한 5:21과 비교해 보라)는 진리는, 2장과 9장에 나오는 다니엘의 기도들, 1장과 6장에서 당국에 도전을 가한 그의 확신, 그리고 3장에서 당국에 도전을 가한 그의 친구들의 확신 등의 기초가 되었으며, 2,4,7,8,10,11,12장에서 하나님이 다니엘에게 드러내신 모든 중요한 내용을 형성한 중심이었음.
- 하나님은 세계 역사와 각 인간의 운명에 대해 최후의 결정을 내리시며, 하나님 나라와 의는 결국에 가서 승리할 것임. 인간들도 천사들도 하나님을 저지하지 못할 것이기 때문.
② 우리의 기도는 하나님에 대한 이러한 견해를 표명하는가?
- 바로 이러한 것들이 다니엘의 마음을 가득 채우고 있던 하나님에 대한 생각이었고, 이는 다니엘의 기도(기도는 어떤 사람이 하나님을 어떻게 생각하는가를 보여 주는 최고의 증거)들이 입증해 줌.
- “영원부터 영원까지 하나님의 이름을 찬송할 것은 지혜와 능력이 그에게 있음이로다. 그는 때와 계절을 바꾸시며 왕들을 폐하시고 왕들을 세우시며 지혜자에게 지혜를 주시고 총명한 자에게 지식을 주시는도다. 그는 깊고 은밀한 일을 나타내시고 어두운 데에 있는 것을 아시며 또 빛이 그와 함께 있도다”(단 2:20-22).
- “크시고 두려워할 주 하나님, 주를 사랑하고 주의 계명을 지키는 자를 위하여 언약을 지키시고 그에게 인자를 베푸시는 이시여…주여, 공의는 주께로 돌아가고(you are righteous)…우리 하나님께는 긍휼과 용서하심이 있사오니…우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행하시는 모든 일이 공의로우시나”(단 9:4,7,9,14).
③ 우리의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측정.
- 우리는 하나님을 이러한 분으로 생각하는가?
- 우리의 기도는 하나님에 대한 이러한 견해를 표명하는가?
- 하나님의 거룩하신 엄위, 하나님의 도덕적 완전함, 하나님의 자비로운 신실하심에 대한 이러한 엄청난 느낌으로 인해 우리 역시 다니엘처럼 겸손하고 의존하며 경외하고 순종하게 되는가?
- 우리는 이를 통해 우리가 얼마나 많이 혹은 얼마나 조금 하나님을 아는가를 측정해 볼 수 있을 것.
4) 하나님을 아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위한 담대함을 드러냄.
① 다니엘과 그의 친구들은 위험을 자초한 사람들이었음.
- 그러나 그것은 저돌적인 무모함이 아니었음.
- 그들은 자신들이 무엇을 하는지를 알았음.
- 그들은 그것을 위해 치러야 할 대가를 계산했고, 닥칠 위험을 평가했음.
- 그들은 하나님이 기적적으로 간섭하지 않으신다면 그들의 행동이 어떤 결과를 초래할지를 잘 알고 있었음.
② 하지만 그들은 이런 것들로 인해 마음이 흔들리지 않았음.
- 일단 자신들의 태도가 옳으며 하나님께 충성하기 위해서는 그런 태도를 취해야 한다는 것을 확신하고 나자, 그들은 오스왈드 챔버스의 말처럼 “결과와 상관없이 기쁘게 그 일들을 행했다.”
- “사람보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마땅하니라”(행 5:29)고 사도들은 말했음.
- “내가 달려갈 길…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행 20:24)고 바울은 말했음.
③ 이것이 바로 다니엘과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가 가지고 있던 마음이고, 하나님을 아는 모든 사람의 마음.
- 그들은 어떤 길이 올바른가를 결정하는 일은 고민스럽고 어려움을 알지만, 일단 그것에 대해 분명히 알고 나면, 그것을 담대하게 주저없이 받아들임.
- 그들은 다른 사람들이 문제를 어떤 식으로 보는지 개의치 않고 그들과 같은 편에 서지 않는다고 해서 걱정하지 않음.
④ 우리 역시 이러한 잣대를 통해서도 우리가 하나님을 얼마나 잘 아는지를 측정해 볼 수 있음.
5) 하나님을 아는 사람들은 하나님 안에서 커다란 만족을 얻음.
: 자신들이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은 자신들을 안다는 확신, 이러한 관계가 죽음을 넘어서 영원토록 삶 속에서 그들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보증해 준다는 확신에 사로잡힌 사람들이 누리는 평화는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음.
① 이것이 바로 바울이 로마서 5:1에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고 말한 평화.
② 그리고 로마서 8장에서 다음과 같이 그 내용을 상세히 분석하는 평화.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성령이 친히 우리 영과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언하시나니…하나님의 상속자요…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누가 능히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을 고발하리요…누구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1,16-17,28,30-31,33,35,38-39).
③ 이것이 바로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가 알았던 그 평화.
- 그들은 느부갓네살의 최후 통첩인 “너희가 만일 (우상에) 절하지 아니하면 즉시 너희를 맹렬히 타는 풀무불 가운데에 던져 넣을 것이니 능히 너희를 내 손에서 건져낼 신이 누구이겠느냐”(단 3:15)에 직면해서도 만족하면서 자기 입장을 굽히지 않았음.
- 그들의 대답(단 3:16-18).
-- “느부갓네살이여, 우리가 이 일에 대하여 왕에게 대답할 필요가 없나이다”(겁먹은 모습이라고는 없음!).
-- “왕이여,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이 계시다면 우리를 맹렬히 타는 풀무불 가운데에서 능히 건져내시겠고 왕의 손에서도 건져내시리이다”(그들은 그들의 하나님을 알았음!).
-- “그렇게 하지 아니하실지라도-구조되지 못한다 해도-왕이여, 우리가 왕의 신들을 섬기지는 아니…할 줄을 아옵소서”(결과가 어떠하든지 아무런 차이가 없음! 살든지 죽든지 그들은 만족함).

주님, 내가 살든지 죽든지 그것은
내가 상관할 바가 아닙니다.
당신을 사랑하고 섬기는 일이 나의 몫이니
주의 은혜로 이것을 주시옵소서.
인생이 길면, 나는 기뻐하리니
내가 오랫동안 순종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인생이 짧다 해도 왜 내가 슬퍼하리요?
끝없는 날로 날아오르는데 말입니다.
⑤ 우리의 만족이 얼마나 광범위한가 하는 것 역시 우리가 정말로 하나님을 아는가를 판단할 수 있는 척도임.

5. 첫 단계.
: 이와 같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원하는가? 그렇다면 다음의 두 단계를 거쳐야 함.
1) 우리는 우리에게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얼마나 부족한가를 인식해야 함.
① 우리는 어떻게 기도하며 우리 마음에서 무엇이 진행되고 있는가에 의해 자신을 측정하는 법을 배워야만 함.
② 이 단계에서 우리가 얼마나 무력한가에 대해 보여 주시도록 주님께 간구해야 함.
2) 우리는 구세주를 찾아야만 함.
① 주님은 지상에 계셨을 때, 사람들을 청하여 그들과 사귀셨음. 그래서 그들은 구세주를 알게 되었으며, 그분을 앎으로써 그분의 아버지이신 하나님을 알게 되었음.
② 구약 성경은 여호와께서 성육신 이전에 나타나셔서 그와 똑같은 일, 즉 사람들이 여호와를 알도록 여호와의 사자로 나타나 그들과 교제하신 일을 기록하고 있음.
- 다니엘서에서 보이는 두 가지 사례.
-- 다니엘의 세 친구와 풀무불 속에서 함께 거닐었던 “신들의 아들과 같았던” 네 번째 사람(3:25)은 누구였을까?
-- 다니엘이 사자굴에 있을 때 하나님이 보내사 사자들의 입을 막도록 하신 그 천사(6:22)는 누구였을까?
③ 여전히 우리는 예수님을 찾고 발견하는 것을 통해 하나님을 발견하고 알 수 있음.
- 주 예수를 발견하기까지 그분을 찾은 사람들만이 세상 사람들 앞에서 자신의 하나님을 안다고 증거할 수 있음.
- 우리가 마음을 다해서 예수님을 찾으면, 분명히 그분을 찾게 되리라는 것이 예수님의 약속이기 때문.

Posted by 김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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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나눔: 『하나님을 아는 지식』(with 김솔)
-2021년 8월 16일 월요일 오후 9시 30분/요약 맟 발제 김성환


제1부·여호와를 알라.

Ⅰ. 하나님에 대한 연구.

1. 1885년 1월 7일, 영국 서더크에 있는 뉴 파크 스트리트 교회의 목사(스무 살의 찰스 스펄전)의 아침 설교.
1) 그리스도인이 연구해야 할 합당한 주제는 하나님의 본성.
2) 신성을 묵상하는 일은?
① 마음을 겸손하게 함.
- 하나님에 대한 생각들보다 더 마음을 겸손하게 해주는 묵상 주제는 없음.
- 우리의 모든 사고는 그 광대함 속에서 길을 잃음.
- 그 주제는 너무나 심오해서 우리의 교만은 무한함 속에 잠겨 버림.
② 마음을 넓혀 줌.
- 하나님에 대해 자주 생각하는 사람은 좁은 지상의 일만을 갖고 씨름하는 사람보다 더 넓은 마음을 가지게 됨.
지성을 확장시킴.
③ 크나큰 위안이 됨.
- 슬픔과 염려를 잊고자 한다면 신성의 깊고 깊은 바다에 잠겨 볼 것.
- 하나님의 광대함에 몰두해 볼 것.
- 신성이라는 주제에 대해 열심히 묵상하는 일보다 더 영혼에 위로를 주는 것을 알지 못함.

2. 누구에게 신학이 필요한가?
1) 하나님의 본질과 성품을 연구하는 일이 비실제적이며 삶과는 무관하다는 도전.
: “이 여정이 정말로 필요한 것입니까? 왜 오늘날 당신이 제안하는 그런 유의 연구를 위해 시간을 허비해야 합니까? 평신도들은 어쨌든 그런 것 없이도 잘 지낼 수 있지 않습니까?”
2) 이에 대한 설득력 있는 대답이 있음.
: 그것은 우리에게 가장 실제적인 과제이고 하나님에 대해 아는 일은 우리 삶에서 아주 중요함.
① 아무 설명 없이 런던 트라팔가 광장에 던져진 아마존 원주민의 비극.
② 마찬가지로 우리가 이 세상의 주인이시며 이 세상을 운행하시는 하나님에 대해 모르는 채로 살려고 애쓴다면, 우리 자신을 무자비하게 대하는 것.
3) 하나님에 대한 연구가 가치 있는 일이라고 인식했다면, 이제 우리는 출발할 준비가 된 것.
4) 어디서 출발해야 하는가?
① 분명 우리는 현재 처해 있는 곳에서 출발할 수밖에 없음.
- 그것은 폭풍우 속에서 출발하는 것.
- 오늘날 하나님에 대한 교리는 폭풍우의 중심부이기 때문.
②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 폭풍우가 잠잠해질 때까지 여정을 연기한다면 우리는 결코 출발하지 못할지도 모름.
- 존 번연의 순례자가 여정을 떠날 때처럼 하나님에 대한 지식으로 이르는 길은 없다고 하는 사람들의 말에 대해서는 잠시 귀를 막고, 나와 함께 그 길을 나서 보자고 요청.
- 결국 백문이 불여일견.
5) 어떻게 우리의 행로를 정할 것인가?
: 그리스도인들이 갖고 있는 하나님에 대한 지식의 다섯 가지 근본 원리가 우리의 행로를 처음부터 끝까지 결정.
① 하나님은 인간에게 말씀하셨으며, 성경은 구원에 이르는 지혜를 갖도록 하기 위해 우리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말씀임.
② 하나님은 그분이 지으신 세상의 주님이시며 왕이심. 하나님은 하시는 모든 일에서 완전하심을 나타내 보이시면서 자신의 영광을 위해 모든 것을 다스리심. 이로 인해 인간들과 천사들은 하나님을 예배하고 찬미함.
③ 하나님은 구세주로서, 믿는 자들을 죄책과 죄의 권세로부터 구하시기 위해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주권적인 사랑을 적극적으로 나타내 보이심. 그리고 그들을 자녀로 삼으시고 그들에게 합당한 복을 주심.
④ 하나님은 삼위이심. 신성 안에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라는 세 위격이 있으며, 구원 사역은 이 세 위격이 함께하시는 역사임. 곧 성부께서 구속하기로 결심하시고, 성자께서 그 구속을 이루시며, 성령께서는 그것을 적용하심.
⑤ 경건이란 하나님의 계시에 대해 신뢰와 순종, 믿음과 예배, 기도와 찬양, 복종과 섬김으로 반응하는 것을 의미함. 삶은 하나님의 말씀 아래서 드러나고 영위되어야 함. 이것이 참된 종교.
6) 우리는 커다란 산을 멀리서 관찰하고, 그 주위를 여행해 보고, 그것이 어떻게 풍경을 좌우하고 주변 경관에 영향을 미치는지를 관찰한 후에, 이제 그 산에 오를 생각으로 직접 거기에 접근하는 여행자의 입장에 있음.

3. 기본적인 주제들.
1) 그 등반에는 무엇이 포함될 것인가(우리의 주의를 끌게 될 주제들)?
① 하나님의 신성.
: 하나님을 인간과 구분해 주고 창조주와 그분의 피조물의 차이점과 간격을 표시해 주는 특성들.
- 자존하심.
- 무한하심.
- 영원하심.
- 불변하심.
② 하나님의 능력.
- 전능하심.
- 전지하심.
- 편재하심 등.
③ 하나님의 완전하심.
: 말씀과 행동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도덕적 성품의 여러 측면.
- 거룩하심.
- 사랑과 자비.
- 진실하심.
- 신실하심.
- 선하심.
- 오래 참으심.
- 정의.
2) 한때 친숙했지만 오늘날 생소해진 주제.
① 우리 대부분에게 이것들은 친숙한 주제가 아니지만, 그 주제들이 하나님의 백성에게 언제나 생소했던 것은 아님.
② 하나님의 속성이라는 주제가, 교회에서 모든 아이가 배우고 모든 어른이 당연히 알아야 하는 교리 문답서에 포함될 만큼 중요하게 생각되었던 적도 있었음(ex: 웨스트민스터 소요리 문답).
③ 하지만 오늘날 웨스트민스터 소요리 문답을 배우거나, 하나님의 성품에 대한 교리를 망라하는 연속 설교를 듣거나, 하나님의 성품이라는 주제에 대한 단순하고도 단도직입적인 글을 읽어 본 사람도 거의 없을 것.
④ 그러므로 앞에서 언급한 주제들을 탐구하는 일은 우리에게 새로이 생각해 볼 내용과 곰곰이 생각하고 음미해 볼 신선한 개념을 많이 던져 주리라 예상할 수 있음.

4. 적용된 지식.
1) 신학적 지식을 추구하는 우리의 동기와 목적을 살핌.
① 우리는 산에 오르기 전에 멈춰 서서 아주 근본적인 질문 한 가지를 스스로에게 던져 볼 필요가 있음. 바로 배우는 자인 우리의 동기와 목적.
② 우리가 신학적 지식 자체를 위하여 신학적 지식을 추구한다면, 그것은 반드시 우리에게 나쁘게 작용할 것.
- 우리를 교만하고 우쭐하게 만들 것.
- 다른 그리스도인들보다 한 단계 위에 있다고 생각하게 될 것.
- 우리가 보기에 미숙하고 부적절한 신학 개념을 가진 사람들을 경멸하고 그들을 아주 가련한 자로 치부해 버릴 것.
- 자기 만족적인 자기 기만 상태에 이를 것.
③ 바울이 우쭐해하는 고린도 사람들에게 한 경고.
: “지식은 교만하게 하며…만일 누구든지 무엇을 아는 줄로 생각하면 아직도 마땅히 알 것을 알지 못하는 것”(고전 8:1-2).
④ 우리는 그런 태도를 갖지 않도록 마음을 지켜야 하며, 그렇게 되지 않도록 기도해야 함.
⑤ 교리적 지식 없이 영적 건강은 있을 수 없음. 하지만 교리적 지식이 있어도 영적 건강이 없을 수 있음.
2) 그렇다면 계시된 진리를 알고자 하는 열망이 잘못이라는 뜻인가?
① 어떤 사람은 ‘계시된 진리에 대한 사랑과, 할 수 있는 한 그 진리를 많이 알고자 하는 열망은, 거듭난 사람이라면 누구나 자연스럽게 갖게 되는 것이 사실 아닌가?’ 하고 물음.
: 시편 119편.
- “주의 율례들을 내게 가르치소서”(12절).
- “내 눈을 열어서 주의 율법에서 놀라운 것을 보게 하소서”(18절).
- “내가 주의 법을 어찌 그리 사랑하는지요”(97절).
- “주의 말씀의 맛이 내게 어찌 그리 단지요, 내 입에 꿀보다 더 다니이다”(103절).
- “깨닫게 하사 주의 증거들을 알게 하소서”(125절).
- 하나님의 자녀는 누구나 이 시편 기자처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에 대해 할 수 있는 한 많이 알고자 열망하지 않겠는가?
- 이렇게 하나님의 진리를 사랑하는 마음을 받았다는 사실은 우리가 거듭났음을 보여주는 증거가 아닌가?(살후 2:10 보라).
- 또한 하나님이 주신 이 같은 열망을 철저히 만족시키고자 애쓰는 것은 옳은 태도가 아닌가?
② 시편 119편 기자의 진정한 관심과 목적.
- 물론 그렇다.
- 하지만 시편 119편을 다시 잘 살펴보면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얻으려는 시편 기자의 관심은 이론적인 것이 아니라 실제적인 것임을 알 수 있음.
- 그의 가장 큰 바람은 하나님을 알고 즐기는 것이었으며, 그는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그 목적을 이루기 위한 수단으로 생각했음.
- 그는, 마음으로 하나님의 진리에 반응하기 위해 그리고 삶으로 그 진리를 따르기 위해 하나님의 진리를 원했음.
- “행위가 온전하여 여호와의 율법을 따라 행하는 자들은 복이 있음이여, 여호와의 증거들을 지키고 전심으로 여호와를 구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내 길을 굳게 정하사 주의 율례를 지키게 하소서”(1-2, 5절).
③ 우리가 견지해야 할 태도.
- 신성을 연구하는 우리의 목적은 하나님을 더 잘 아는 것이 되어야만 함.
- 우리 관심사는 하나님의 속성에 대한 교리들만이 아니라 그 속성을 지닌 살아 계신 하나님을 더 잘 아는 것이 되어야 함.
- 하나님이 우리 연구의 주제이며 연구하는 우리를 도우시는 분이듯이, 하나님 그분이 연구의 목적이 되어야 함.
- 우리는 하나님을 연구하면서 하나님의 인도를 받기를 구해야 함.

5. 진리에 대해 묵상함.
1) 그렇다면 어떻게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하나님을 아는 지식으로 바꿀 수 있는가?
: 하나님에 대해 배운 각각의 진리를, 하나님 앞에서 묵상하는 내용으로 바꾸어 하나님을 향한 기도와 찬양으로 이어지도록 하는 것.
2) 묵상이란 무엇인가?
① 묵상은 오늘날 잃어버린 기술이며, 그리스도인들은 그것을 몰라서 통탄할 만큼 괴로움을 당하고 있음.
② 묵상의 정의.
- 묵상이란 하나님의 사역과 도(道), 목적과 약속들에 대해 자신이 아는 것을 상기하고, 숙고하고, 깊이 생각해 보고, 자신에게 적용하는 활동.
- 그것은 하나님의 임재 안에서, 하나님이 보시는 가운데,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하나님과 교통하는 수단으로서, 의식적으로 수행하는 거룩한 사고 활동.
③ 묵상의 목적.
- 묵상의 목적은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정신적, 영적 시각을 밝히는 것이며, 하나님의 진리가 우리 마음과 뜻에 충분하고도 적절히 영향을 끼치도록 하는 것.
- 묵상은 자신에게, 하나님과 자기 자신에 대해 말하는 것. 그것은 종종 자신과의 싸움, 의심과 불신의 풍조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능력과 은혜를 분명하게 이해하도록 스스로를 설득하는 것.
④ 묵상의 결과.
- 우리는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영광 그리고 우리 자신의 하찮음과 죄성을 묵상함으로 겸손해짐.
-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드러난 신비로운 하나님의 자비를 묵상함으로써 격려와 평안을 얻음. 즉 묵상은 우리를 ‘위로해 줌’.
- 우리가 이처럼 겸손해지고 고양되는 체험 속으로 깊이 들어가면 갈수록 하나님을 아는 우리의 지식은 점점 증가하며, 그와 함께 우리의 평화, 힘, 기쁨도 증가함.

Posted by 김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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